달리기가 나에게 알려준 것들, 오세진

23.1.10. 시작
23.1.17. 03:00 즈음 읽기 끝.

한 마디만 하자면 몸보다는 마음으로 달리기를 하는 나는 너무 좋았어.

달리기로 마음이 편안해지는게 좋은 사람들에게는 추천.

이건 책 이야기는 아니지만 달리기 이야기를 하자면.

달리기를 안 해보셨다면 100미터부터 천천히 일단 시작해보시라!

달리기가 힘들기만 하다면 조금 더 천천히 더 느긋하게 뛰어보길 추천.

달리기를 하고 있지만 거리를 늘리기 무섭다면 그냥 갑자기 한번 조금 거리를 늘려보길 추천. 단, 천천히 더 천천히 달리기.
(나도 그렇게 해볼 생각임. 속도는 나도 아직 무서운 영역이라 말을 못 하겠음)

밀리의 서재 서평에 자기 광고가 많다고 해서 안 읽고 있다가 달리기 책은 읽고 싶은데 딱히 읽을 책이 없어서 읽기 시작.

일단 난 모르겠는데. 광고? 자랑? 모르겠음. 만약에 자랑이라고 하더라도 좋아하는 건 자랑하고 자랑해도 얼마든지 된다고 생각함. 좋아하는 걸 말하고 싶은 건, 내가 좋아하는 걸로 얻은 걸 말하고 싶은 건 너무 너무 순수한거라고 생각함.
어쩌면 자랑일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마음이 난 보이는데.

한 가지.
뭐든 그렇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취미도 열심히 하다보면.
좋아함보다 의무감이 더 커질 때가 있는데.
(잘 하고 싶고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더.)

그 의무감 때문에 작가님이 좋아함을 버거워 하지 않기를 바람.
의무감이 너무 커져서 좋아함보다 힘듦이라면 의무감이랑 연결되는 것은 잠깐이라도 고리를 끊기를 바람.
그 끊김으로 잃는 것이 적지는 않겠지만 휴식도 훈련이니까.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
작가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뭐랄까. 독백같다고 할까.
읽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자기한테 더 하고 싶은 말이랄까.
내가 한번 해도 그걸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계속 그걸 하고 싶다는 다짐을 담은 독백이랄까.

일단 하자! 고고! 단, 마음(욕심)은 작게, 작게.
나는 할 수 있고, 못 해도 완전 괜찮아.
했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하는 거.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것뿐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발췌.

달리기는 하면 된다는 걸 가르쳐주었습니다.
    - 이선우(런앤런 대표,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힘들고 지칠 때, 마음정리가 필요할 때, 달리는 일이 이렇게 힐링이 될 줄 몰랐어요.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이, 가파른 호흡이, 제 마음의 걱정덩어리들을 날려주더라고요. 마음의 충전이 필요할 때 운동화 신고 달려보세요.
    - 김유선(아모레퍼시픽 책임)

나는 달린 후 마실 콜라에 대한 열정 하나로 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콜라는 숨차게 힘차게 달리며 땀을 쫙 빼고 마시는 콜라다.  

런던마라톤 3회 우승에 빛나는 폴라 래드클리프(Paula Radcliffe)는 이제 갓 러닝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일단 나가서 달려보세요. 직접 해보면 재미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잖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저 달리고 싶다면 출발하면 된다.  

한 걸음, 첫 걸음은 힘들다. 하지만 한 걸음이 다음 걸음을 가능하게 하고 어느새 그림 같은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JUST GO! 머리가 생각에 빠지기 전에 실천하자.

사막레이스 전 장거리에 대한 부담감이 밀려왔다. 막상 저지르긴 했으나 그 대책 없음이 어이도 없고 걱정도 됐다.

숨이 차서 죽을 것 같고 다리가 무거워 들어올리기가 힘든 순간엔 ‘그냥 한 걸음만 더 달려보자’라는 말을 수없이 되뇐다. 다리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그래도 한 걸음 정도는 더 갈 수 있지 않냐며 끊임없이 내 다리를 달랜다. 매 걸음이 고통일지라도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못할 것 같던 1킬로미터는 더 달려낼 수 있다.

달리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두 다리는 생각보다 끈기 있고 심장과 폐는 기대 이상으로 강하다는 믿음. 내가 즐겁게 잘 달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달린다.

무리되지 않게 가다 서다 하면 된다고 나를 설득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스를 잡아주는 일명 ‘동반주’를 해주겠다고 했다.

‘동반주’는 쉬운 게 아니다. 숭고한 일이다. 그는 힘들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며 10킬로미터 마라톤 일정을 하나 보내왔다. 당연히 나는 그 날짜에 마침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댔다. 그랬더니 또 다른 날짜를 보내왔다. 나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마침 그날 부모님과 약속이 있다고 했다. 거짓말을 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달리기는 싫고, 내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권유하는 그의 말을 딱 잘라 거절하기도 힘들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요리조리 도망 다녔다. 그랬더니 또 한 번 다른 날짜를 보내왔다. 더는 그 마음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날짜를 잡았고 그렇게 첫 대회를 기다리던 중, 대회를 앞둔 며칠 전 심한 감기에 걸렸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온몸이 아팠다. 몸은 아팠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 와중에 ‘아, 안 뛰어도 되겠구나’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기쁜 마음을 살포시 누르고 그에게 전화를 했다. 도저히 달릴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님을 강하게 어필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함에 대한 죄송한 마음도 전했다.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도저히 지금 뛸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말에 그는 “어, 세진아, 몸조리 잘하고. 그리고 걱정하지 마. 마라톤대회는 매주 있어”라며 마라톤 일정 8개를 한 번에 메시지로 보내오는 게 아닌가? 천천히 일정 살펴보고 이중에 하나 골라보라고 하는 말에 그야말로 뜨악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달리기를 ‘속도의 스포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길 위에서 즐겁기 위해 달릴 뿐이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묘비명을 내 식으로 바꿔본다면 ‘나는 달리기 중 자주 걸었다. 하지만 멈추진 않았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첫 10킬로미터 기록은 1시간 30분. 달리기 좀 하는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보면 동네 마실 다녀왔네요라고 할 그런 기록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가 정말 대견했다. 10킬로미터를 버틴 내 다리도 정말 고마웠고, 이렇게 쉬엄쉬엄 했음에도 생각보단 빠른 기록이었기에 다음이 기대됐다. 조금만 덜 쉬고 한 걸음만 더 달리면 1시간 20분 안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잔잔한 기쁨과 긍정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내 인생에 풀코스는 절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살면서 백프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42.195킬로미터를 달리게 되다니. 세상일은 이리도 알 수가 없다. 앞으로는 ‘절대’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절대’라는 말은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의 어리석은 시각으로부터 나온 말임을 이제야 경험으로 알게 됐다.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달려보니 그 시간 동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가지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뇌가 외부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디폴트 모드가 된다고 한다. 이른바 달리기를 통한 명상효과를 경험한 것이다.

풀코스를 달리다보면 엔도르핀과 세로토닌의 대 분출로 한순간 모든 고통이 사라지며 기분이 좋아지는 ‘러너스 하이’ 상태에 도달한다더니 개뿔, 풀코스는 풀(full)로 힘들었다. 왜 나에게는 ‘러너스 하이’가 허락되지 않는 걸까.

응원단들이 나눠주는 콜라를 마시고 힘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콜라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신비의 물약이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내 콜라 사랑은 시작됐다. 평소에 탄산은 입에도 안 대는데 유독 달리기 한 후에는 자꾸만 콜라가 당긴다.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가는 순간 돌덩이 뭉친 것처럼 순식간에 다리가 굳어버린다. 쥐가 내렸다. 움직일 수가 없어 그대로 인도에 주저앉았다.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경찰이 다가오더니 “쉬다가 다시 갈 수 있어요? 앰뷸런스 타실래요?”라고 묻는다. 앰뷸런스를 타는 순간 기록칩을 떼야 하고 결국 완주를 못하게 된다. 어떻게든 완주를 하고 싶었다. “아뇨! 저 갈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일어서려는데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다시 주저앉았다. 통증이 와서 부여잡고 있었더니 다시 “앰뷸런스 타실래요?”라고 묻는다. 갈 수 있다는데 왜 자꾸 앰뷸런스를 타라고 하는지……. 경찰에게 “저 갈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상황이 너무 속상해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절실함을 느꼈는지 경찰은 주로를 향해 “여기 허벅지에 쥐가 나서 못 움직이는데 도와주실 분 계신가요?”라며 도움을 구했다.
  그때 두 명의 선수가 다가오더니 어깨를 잡고 다리를 들어 스트레칭을 해주고 쥐가 풀어질 수 있도록 주물러줬다. 그러고는 포도당 캔디를 까서 내 입에 넣어주고 본인의 에너지젤까지 주며 힘내라고 격려를 한다. 자신의 기록도 중요했을 텐데 기꺼이 도움을 주신 두 선수에게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했다. 따뜻한 마음 덕분에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다시 달릴 수 있었다. 붉은색 목동마라톤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이름 모를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다시금 마음 전하고 싶다.


트레일 러닝은 한 번의 경기에 여러 번 새로운 코스를 경험하게 된다. 마라톤은 땡볕에서 구어짐을 당하면서 끊임없는 아스팔트 위를 일정한 페이스로 계속 달려야 한다. 뛰다보면 그 길이 그 길 같을 때도 있다. 좀 지루하다.


난 무난한 코스라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제대로 낚였다. 끝없는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바위를 타고 넘어야 하는 능선과 밧줄을 잡고 내려와야 하는 내리막까지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한 코스였다. 유격훈련을 온 건가 싶은 착각에 빠졌다.  


‘한계란 한 게 없는 사람들의 핑계’라는 말을 몸으로 경험한 일이다.


귀차니즘이 발동해 가기 싫어질 만큼 필수장비가 많았다. 트레일 러닝 조끼와 물통, 그리고 비상시 체온을 유지해줄 서바이벌 블랭킷, 일명 은박지. 거기에 우비,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 컵을 주지 않기에 물을 받아 마실 개인 컵도 챙겨야 했다.


아무튼 첫 장거리 트레일런 대회에서 깨달은 건 내 시야에 앞 선수가 보여도 같은 조건의 힘든 상황 속에서는 그가 멈춰 서지 않는 이상 따라잡기가 힘들다는 거였다. 욕심이 앞서 능력 이상의 빠른 페이스로 달린다면 잠시 추월은 가능하나 얼마 못 가 퍼질 게 분명하기에 그저 내가 낼 수 있는 속도로 부지런히 가는 수밖에 없다. 앞 사람이 멈춰 서길 기대하고 기다리고 끌어내리려 하기보다 꾸준히 한 발 한 발 쉬지 않고 걸으면 적어도 뒤에서 오는 선수에게 잡힐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여 더 빠르게 열심히 달려 나를 추월하는 선수가 있다면 존경의 박수를 치며 앞 선수의 발걸음을 응원했을 것이다.


운동은 자신을 위해 행하는 일이며 나를 건축하고 세우는 의미 있는 행위다. 나는 그 방법으로 달리기를 선택했다. 포디엄에 오르던 오르지 못하던 간에 완주하는 모든 사람이 챔피언이다!

나 자신을 개선하면 내 세상을 개선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렇게 내 세상을 행복하게 물들이는 중인 듯하다.  

“님, 면봉이세요?”
주위에서 걱정이 많다. 머리만 커 보인다며 살 너무 빼지 말라고 한다. 그게 내가 빼는 게 아니라 빠져 보이는 거라 설명해도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묻는다. 친한 친구들은 멸치 대가리 같다며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러너 아닌 자들이 모르고 하는 말에 성낼 필요 없지, 라며 나를 다독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친구들 말을 인정한다. 내가 봐도 좀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기에. 몸무게는 그대론데 군살이 빠지면서 달리기에 최적화된 몸이 되고 있다. 뭐 언뜻 보면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면봉 같기도 하다. 체중감량을 원하는 자들이여 달리기를 하자! 이것만큼 건강한 살 빼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게 나쁜 날씨란 없다.
하늘이 맑던 흐리던 모두 그 나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풀코스나 트레일 러닝 대회 전날이면 의식처럼 먹는 음식이 바로 짜장면이다. 사실 그냥 맛있어서 먹는데 대회 핑계를 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짜장면 한 그릇을 설렘과 함께 비벼 먹는다.

카보로딩(Carbohydrate Loading)이라고 글리코겐 축적을 위해 탄수화물 비중을 높이는 식사법을 의미한다. 프로 선수의 경우는 일주일 전부터 글리코겐을 전부 소진하는 고강도의 운동 후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하다가 대회 삼일 전부터 탄수화물 양을 늘리며 체내에 최대한 많은 글리코겐을 저장하게 된다.  

“긴장이 아닌 기분 좋은 설렘인 거예요.”

나의 첫 DNF다. 우리 멤버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DNF는 ‘Do next finish’라고 했다. 참 좋은 말이다. 앞으로도 달리고 싶은 곳을 달릴 기회도 많기에 이는 끝이 아닌 다음을 기약하는 일이다. 생각해보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멈춰 서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다.  


잘할 수 있을까를 걱정할 시간에 일단 경험해보라. 생각지도 못한 잠재력을 발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는 오늘을 살고 있다. 매 순간 한계에 부딪히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 놓이기도 한다. 그 순간 스스로의 힘을 믿어라.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너 자신의 신화를 펼쳐라(Unfold your own myth)’라는 말처럼 당신의 신화는 이미 당신 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것을 계속 잠재워둘지 발휘할지는 온전히 당신의 선택이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는 그 한 마디, 그 느낌 하나가 얼마나 나를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용기를 주는지 모른다. 그렇게 언제나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아름다움은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과 마음속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물체 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이것을 응시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라고도 했다.  

장비와 내가 물아일체가 되어 한 몸으로 움직여지는 순간 장비빨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기본에 충실하자. 그런데 기본에 충실하자고 다짐하는 이 순간에도 유니크한 모자와 러닝용 양말에 눈길이 가는 건 왜일까. 결론은 사람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매번 훈련이 끝난 후 코치들이 아이싱 꼭 해줘야 한다며 당부한다. 초기엔 아이싱의 필요성을 잘 몰라서 찬물로 대충 몇 번 쓱쓱 뿌려주는 걸로 끝냈다. 그러다가 무릎이나 발목에서 열감이 계속 느껴지고 아파왔다. 그때 아이스팩을 대고 진정시켜주니 다음날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역시 경험이 중요하다. 직접 느껴보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그 후부터 러닝 후 아이싱은 필수 코스가 됐다.


어쨌든 보여지기 위한 키는 성장이 멈춘 지 오래지만 내 몸과 마음의 근육은 달리기를 통해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 그래 이제와 성장, 가능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아닌가. 내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한 번 끝까지 가보자!


어렵게 어렵게 합류한 첫날 “안녕하세요, 오세진입니다”라는 간단한 인사를 하고 바로 훈련에 돌입했다. 정말 한 시간 내내 달리기만 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다들 진지하게 트랙을 돈다. 쉼 없는 트랙 뺑뺑이를 끝내고 훈련 종료 후 바로 해산이다. 정말 좋았다. 순수하게 운동을 위한 모임이라는 강한 느낌이 빡 든다. 모임에 대한 그 어떤 강요도 뒤풀이도 없는 깔끔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나에게 움직이지 않고 몸을 쓰지 않아서 아픈 거라고 했다. 숲길에 인적이 드물어지면 길이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의 몸도 사용하지 않다보니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잃어버리게 된다는 말이었다.

타인에게 ‘너는 거기까지야’라고 규정당하고 스스로에게도 ‘그게 가능할까’라고 외면당해 발현되지 못했던 가능성들이 벽을 깨고 나오는 기분이다. 결국, 한계란 스스로 지운 굴레에 불과하다는 것을 달리기를 통해 매번 느낀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계속 달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조금밖에 없지만 달리는 것을 그만둘 이유는 대형 트럭 가득히 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주 적은 이유’를 하나하나 소중하게 단련하는 것뿐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수백 가지를 상쇄하는 단 하나의 주문은 JUST GO! 그냥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기분을 움직이고 결심을 바로잡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가기까지가 힘들고 귀찮은 거지 막상 도착하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원 없이 달리고 나면 그간의 스트레스가 해소된다. 달리면 숨은 차지만 마음에 쉼이 찾아온다. 숨이 찬 덕분에 숨 쉴 공간이 생긴다는 아이러니. 이것이 바로 내가 달리기를 사랑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달리기를 왜 하느냐는 질문에 ‘그냥 좋아서요’라고 말한다. 좋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내 표정에서, 눈빛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가 그랬듯 우연히 만난 한 걸음이 당신을 전혀 다른 세계로 인도해줄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 전의 내 삶이 무채색이었던 건 어쩌면 내가 색칠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냥 좋아서 하고 있고 해보면 안다.  

다른 이에게 갈 수도 있었을 기회가 운 좋게 나에게 왔는데 대충 준비해서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다. 나란 사람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진정성 있게 행하고 싶었다.

국적을 떠나 그 길을 달리는 선수들을 향해 목청껏 소리치며 응원해주고 있었다. 그 응원을 받으며 달리는 길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멈춰 서고 싶지도 않았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얼굴엔 뜨거운 눈물도 흘렀다. 이렇게 가슴 뛰게 달리고 있는 것이 좋았고 그 순간 그 공간에 내가 존재하는 것도 감사했다.  

그날 나는 ‘나의 러닝은 나를 닮았다’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달렸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내 달리기가 나를 닮았다고 하는데 내가 이 달리기, 지금 이 경기를 포기하면 나를 포기하는 거야. 나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과 같다며 정신무장을 했다. 그냥 주어진 기회이기에 대충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렇기에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에게 있어 남다르다는 의미는 기존의 관습을 벗어던지고 제멋대로 산다는 것이 아닌 여러 벽에 부딪히고 깨지며 결국, 그럼에도 내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내 삶을 나는 사랑한다. 내 마음을 충동질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 순간에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 행복하다.

“성공이란 당신이 하고 싶을 때 좋아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다”라는 앤서니 라빈스의 말대로라면 분명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는 “일이 즐거우면 이 세상은 낙원이요, 일이 괴로우면 세상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짐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평소에 훈련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빨리 달리기보다 조깅으로 무리 없이 꾸준히 훈련한다”고 말하는 미라의 대답에 그녀가 이야기하는 조깅은 과연 어느 정도의 빠르기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가 말한 천천히 달린다는 그 조깅 페이스가 적어도 나에게 풀페이스(최대한 달릴 수 있는 빠르기)를 의미함을 자각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라는 웃는데 그 뒤에서 팀미라라이 멤버들과 나는 죽을상을 하고 따라가는 뭐 그런 형태였다. 원래의 계획은 팀미라라이가 출발은 앞에서 하되 출발과 동시에 속도를 늦춰서 완벽한 펀런(빠르게 달리기보다 즐기며 천천히 달림을 의미하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빨랐다. 그것도 상당히 빨랐다.

특히 그녀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메시지인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발견했음 해요. 당신은 강하고 할 수 있어요”는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겨울에는 그저 잠들어 있는 듯 보이지만 모든 생의 에너지를 농축시키고 집약시키는 과정이 소리 없이 눈에 보이지 않게 진행된다.  

매일 반복되는 패턴을 깨는 것, 늘 가던 카페가 아닌 조금 더 떨어진 곳에 간다거나 책 한 권 들고 가볍게 나서는 산책도 해당된다. 결국 떠남은 잘 돌아오기 위함이다.

와카야마에서 열리는 우메노사또 트레일 러닝을 가게 된 이유는 단 하나,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이라는 홍보 글 때문이었다. 그래 봄 맞으러 가자. 마음이 시키는 일임을 직감했고 빠르게 실천했다.  

지인들은 달리기가 방사능 공포를 이겼다며 놀려댔다. 뭐, 변하니까 사람이지.

나이가 삼십 후반이 되어서야 나마비루(생맥주) 맛을 알게 된 나는, 여전히 모르는 게 많고 새로운 모든 것에 조심스레 도전하는 그런 인간이다.

에너지 클럽.
예예예예~! 손을 마주 걸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인사를 나눈다. 헉! 이 당황스러운 인사법은 뭐지? 나도 모르게 뒷걸음친다. 보아하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하다. 주위를 스캔해보니 오늘 처음 에너지클럽에 온 사람들 대부분이 적잖이 놀란 듯하다. 여기 모인 기존 멤버들의 에너지가 흘러 넘쳐 감당이 안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이곳은 ‘당신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모임’이고 이런 기운이 스며들고 물들어 더 번져나가기 위해 실천하고 배움을 이어가는 곳이다.
전주 에클(에너지클럽의 줄임말)에 갔을 때 강연 전에 한 중후한 남성과 같은 조에 앉게 됐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기가 도대체 뭐 하는 모임이냐고 물어왔다. 이분도 내가 처음 느꼈을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에너지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더불어 에너지클럽을 신재생에너지나 관련된 공부를 하는 학회 비슷한 느낌의 모임으로 알고 신청했다고 한다. 잘못 온 거 같다고 일어서려는 그 사람에게 이왕 오신 거 뭐 하는 모임인지 궁금하다면 경험해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과정이 끝난 세 시간 후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밝은 표정으로 다음에 또 만나기를 기약하며 나갔다.

누구에게는 별 볼일 없는 목표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목표가 참 좋다. 속도 경쟁을 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 자신의 걸음, 호흡에 맞춰 집중하며 즐기는 것의 가치가 느껴진다. 나 역시 런린이 시절 달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저 함께 즐겁게 달렸고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말을 한 것뿐이다. 모든 노력은 함께 달린 그들 스스로 한 것이고 자신이 만든 성과다. 그저 지금처럼 건강하고 즐거운 러닝을 이어가준다면 그것만으로 나는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삶은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신비다.’
숙제 같은 오늘을 살지라도 매 순간 자연과 삶이 만들어내는 신비를 느끼며 깨어 있길 바란다.

지나간 오늘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니까 대충 살면 대충의 내가 되겠지. 그러기에 한 번뿐인 이 순간에 잘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다.

그곳에 다녀온 사막 선배들의 입을 통하면 아타카마사막은 사막의 끝판왕이란다. 사막의 끝판왕! 이 말이 또 나를 잡아끈다. 왕은 깨라고 있는 거지! 나는 참 이상한 포인트에 꽂힌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지만, 꽂히면 가는 성격 덕분에 이렇게 잘 저지르며 살고 있다.

스스로 한계를 지우지 말자. 과연 몇 킬로미터까지 달릴 수 있을지, 얼마나 빠르게 뛸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리 선 긋지 말고 몸이 나아가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저 즐겁게 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생각보다 아주 먼 곳까지 나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누구보다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장담한다. 달리기나 인생이나 끝까지 가봐야 안다. 삶도 달리기도 피니시 직전까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달려보자. 어디까지 가게 될지 그 끝은 어디일지 함께 가보자.



달리기의 맛

달리기 책인 줄 알았는데
맛 책이다라는 생각도 드는데.

음. 
인생 이야기, 진로 이야기.
그런 책. 

뻔하지 않은 흐름에 
뻔하지 않은 결말에
약간의 반전?

재밌고 좋은 책!

왜 그런지 눈물을 많이 흘리며 읽었던 책!

추천!

달리기를 좋아한다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겠지만
달리기를 하나도 좋아하지 않아도 재밌게 감동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임



오차즈케, 나메로

하코네 역전 마라톤

쾌활한 미야코
친절한 소마

마이에 소마
마이에 하루마

21.35킬로미터를 달려온 어깨띠는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것이 한 명분, 두 명분 쌓이면서 어깨띠는 조금씩 무거워진다. 

거침없이 자기 앞을 달리는 그 등을 응시하며 자신이 가진 언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가, 하루마는 생각한다. 그가 달리는 모습의 힘과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단 하나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바람에 올라탄 듯이. 온몸이 바람 속에 스며들듯이. 가볍게 날듯이. 

아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달린다는 건 얼마나 좋은지! 그런 단순한 기쁨에 온몸이 튀어 오른다. 

요리 연구부라는 것도 정답. 나 혼자뿐이지만, 부원은. 

혼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거기 한 사람쯤 동료가 있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저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지금의 자기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건지도 모른다. 

응원 소리가 들린다. 앞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가장 잘 들리는 것은 자신의 숨소리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자신은 밀당을 잘 못한다. 달리는 모습을 보고 상대방의 생각을 간파해서 몸 상태나 시합의 방식을 짐작하는 데는 약하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을 이기려고 용을 써 봤자 안 된다. 그저 달린다. 몸과 대화해 가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말 속에 숨은 비아냥도 불신도 너무 잘 알고 있다. 묻고 싶은 것도 잔뜩 있겠지. 하지만 묻고 나면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도 하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았다. 시금치를 수돗물로 씻는 소리 때문에 안 들렸다. 그런 걸로 했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왠일인지, 소마의 대답을 기다리는 단 몇 초가 무서웠다. 

자신이 달림으로써 형이 그것을 잊어 주었으면 했다. 

숨소리도 발소리도 그다지 크지 않아. 조용히 다가오는 거야. 조용하긴 한데 엄청나게 강한 소리지. 귀 안쪽으로 발소리가 울려와. 바로 뒤에 바짝 붙었을 때는 소름이 돋았어.

괜찮아.

가벼운 발걸음은 결코 아니었다. 한 발 내밀 때마다 발이 지면에 박히는 듯한 무겁고 힘찬, 오싹할 정도의 박력이었다. 장기인 깔끔한 폼도 무너지고, 턱도 올라가 있었다. 일찌감치 한계를 넘어 몸속이 텅 비어 버렸지만, 그래도 몸이 부서질 때까지 달리려는 듯했다. 

오늘 자기가 이기지 못한 후지미야를. 그걸 도대체 왜 없었던 일처럼 말하는 걸까?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꿈이나 헛것이라도 봤다는 듯이. 

돌아본 얼굴은 오싹할 만큼 무표정했다. 그의 등 뒤로 끔찍하게 날카로운 바람이 불었다. 사죄의 말은 지워져 버렸다. 
나는 너를 위해 달리거나 하진 않아
나는 나를 위해 달렸어. 내가 지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달린 거라고.
스스로 달렸고 나 때문에 부상한 거야.
착각하지 마  

께느른한 표정

스케가와의 음성은 단순히 참견꾼 같은 호기심과는 달랐다. 달라서 더욱 성가시다. 

스케가와랑은 줄곧 함께였으니까 알 수가 있어.
뭘?
서로 말하고 싶은 것이라든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든가, 그냥.
(왜 또 눈물이 나고 또 또 날까. 난. 리얼 2.20. am 12:47)

텅 비어 버린 부분을 요리하는 일로 채운 듯한 기분이 된 것뿐인 거 아냐?

제멋대로 그만둔 형이  '너를 위하여' 하는 표정으로 만들어 주는 밥을 먹어야 하는 동생이 불쌍하네. 

너 정말 그래도 괜찮아? 
응. 괜찮아.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목이 제 일을 하지 않아 목소리가 안 나온다. 눈물이 솟아나는 것을 깨닫는다. 눈물이 눈에 고여 가는 것을, 알겠다. 
솔직히, 무서워, 달리는 게.

부상을 당했을 땐 슬펐어. 약도 오르고. 그렇지만 안심도 됐어. 
그만둘 핑계가 생겼으니까?

도망쳐도 된다고 생각해. 
그런 것이, 나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없어져 버린 곳에 필사적으로 다른 것을 채워 넣고 있어. 

순수한 동료라는 존재여도 좋고 기록이나 순위를 겨루는 상대라도 좋다. 장거리를 달리는 선수에게 옆을, 앞을, 뒤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마 미야코는 모를 것이다.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내몰리면서도 끝내 녀석은 달린 것이다.

긴 거리를 달리려면 리듬이 중요한 것이다. 일정한 페이스, 일정한 속도로 달린다. 급격히 뭔가를 바꿔 버리면 안 된다. 

러닝슈즈를 일상적으로 신고 있었다. 

만나고 싶다고 할까, 함께 요리를 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거든. 

그렇다. 내 앞에서 소마는 언제나 형인 것이다. 형으로밖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내 앞에서 형은 진짜 이야기는 무엇 하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조리 실습실로 발을 옮긴다. 성적이 좋아지지 않아 힘들어도, 담임이나 진로 지도 교사에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소마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이유를, 스케가와는 하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쓸쓸하지.
그렇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이에 소마가 없어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쓸쓸한 일이다. 어째서일까? 고작 삼 년간 부 활동을 같이 했을 뿐 아닌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
그렇게까지 마이에 소마가 옆에서 달려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이에 소마는 지금 마치 가까스로 달리기에서 해방되었다하는 얼굴을 하고 있거든. 그래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녀석은 달리는 게 무서워서 달리고 싶지 않아. 지는 것에 싫어서 달리고 싶지 않아. 하는 욕심에 사로잡혀서 달릴 수 없게 되어 버린 것뿐이야. 

라든가, 라든가, 그런 쓸데없는 신경은 쓰면서도 정작 중요한 말은 하지 않은 채 여기까지 와 버린 건 아니었을까?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할 서 있었다는 느낌이랄까?

미야코에게 가자. 오늘은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늦었어도

괜찮다, 괜찮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슴속에서 되풀이했다. 

괴로워하는 그에게,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죄책감이라는 얇고도 날카로운 칼날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베었다. 제멋대로, 혼자서.

나도 잘 모르지만 싫었어, 녀석이 힘들어하는 것이.

그래도 계속할 수 있어서 좋았어.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당사자인 내가 후회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걸로 된 거지?

소마의 흐느낌에 미야코도 후지미야도 침묵하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필요 없다고, 아플 만큼 이해하고 있었다.

제대로 달려. 어디까지고 달려가라. 






 

 

 

CHATGPT에게도 물어보았다. ㅎㅎ 

 

소설 달리기의 맛에 대해 알려줘

 

소설 "달리기의 맛"은 마라톤을 주제로 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마라톤을 달리는 주인공의 성장과 극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과 인생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 소설은 달리기에 대한 진심 어린 열정과 헌신,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성취감과 행복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이 소설은 또한 달리기를 하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이점들을 보여주며,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기 위한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이 소설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열정과 가능성을 깨우치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마라톤을 달리는 과정에서는 몸과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을 믿는 강한 의지력과 인내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노력과 열정을 통해 주인공은 마침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고, 그로 인해 더 큰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달리기의 맛"은 달리기를 좋아하거나, 새로운 도전을 위해 열정과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매우 추천할 만한 소설입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다면 사도 아깝지 않은 책.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사람을 만난다면 사줘도 아깝지 않은 책.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책을 주고 싶은 책. 

 

 

 

 

 

 

멈추면 땀은 식기 마련이지만 땀이 식으면 더 춥구나라고 생각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생각

 

좋든 싫든

나 혼자 자꾸 생각하는

정답을 떠올리기 싫은

틀린 대답을 하고 싶은 물음

 

흔해빠진 일들을 쌓아 

내가 만든

고립과 단절의 어둠

 

비가 안 오면 물은 마르기 마련

날이 따뜻해지면 오리도 떠나기 마련 

 

강물처럼 길만 따라 흘러가는 대로 

구름처럼 바람만 따라 흩어지는 대로 

본질은 잊고 그냥 열심히 달릴 것

 

지금 그저 달리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임을

내가 하고 싶은 것임을

내가 되고 싶은 것임을

내게 달리기가 찾아온 의미임을 

생각하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공백으로 지워가며

내가 누구인지를

침묵으로 버텨가며

어둠을 어둠으로 느끼지 못할 때까지

내 페이스와 시간성으로 

소리 죽여 그냥 달릴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핑계를 대지 말 것

건너뛰거나 그만두지 말 것

이것이 내 생명선

 

달리고 달리다 보면 해가 뜨고 

산봉우리에 걸린 짙은 안개를 걷어 낼 것을 

 

어둠을 달리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을

 

지금 내 달리기를, 

내 가능성을, 

나라는 존재를 

믿고 믿고

 

소리 죽여 

흘러가는 대로 

흩어지는 대로 

그냥 달릴 것

 

(나는 그런 것)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달린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명상 상태와 비슷한 주법이었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체를 움직여 나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직감적으로.

 

지금도 나라고 하는 인간 속에 그만한 가능성이 남아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

 

달리는 생활이 별로 대단한 일도, 대단한 분량도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뭔지 모를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뭐가 어찌 됐든, 그저 한결같이 달리고 있다.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달리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는 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소리내어 말해보면, 거기에서 뭔가를(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마는 듯한 절실한 감각을 느낀다. 

 

실패가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확실하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나는 이런 일에 관해서는 비교적 집요한 성격이다. 뭔가 잘 안 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잘 될 때까지 납득도 할 수 없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는다. 

 

나는 그런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좋은 싫든,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




 

 

하고 싶은 것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

 

나는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서툴지만, 트라이애슬론 선수들과는 마음 편하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느 쪽이냐 하면, 특수한 인종인 것이다. 연대감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해도, 따사로운 공통점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는 막연하게, 늦봄 산봉우리에 걸린 옅은 빛깔의 안개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끝으로, 함께 뛴 모든 주자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만약 그 주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이렇게 계속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생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램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이젠 그저 레이스를 마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것이 실제로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 해나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달리는 이야기에 관한 책이지 건강법에 관한 책은 아니다. 

 

나는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달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손을 움직여서 이와 같은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고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할 때 편해진다.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런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다.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경기에는 잘 맞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좋든 싫든 그것은 타고난 나의 성격인 것이다.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 있어야 할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버린 듯한 폐쇄감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립과 단절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나는 신체를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직감적으로.

 

협조하려는 마음이 없는 그런 인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혼자 벽장 속에 웅크리고 있으려는 그런 인간에게, 도대체 누가 호의를 느낄 수 있겠는가?

 

달리는 생활을 되찾은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뭔가를 의미하고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대단한 분량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뭔지 모를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뭐가 어찌 됐든, 그저 한결같이 달리고 있다.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매일 달리게 되면, 담배를 끊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ㅡㅡ 더 달리고 싶다는 욕구는 금연을 계속하기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금단현상을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상당히 좋은 가게다 마음에 든다 또 오고 싶다라고 생각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경영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마음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스트레칭 같은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부상 하나, 상처 하나, 병 한 않은 적이 없다. 뛰어난 러너는 전혀 아니지만 튼튼한 러너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부럽다)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나라고 하는 인간 속에 그만한 가능성이 남아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에게 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괭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에 도달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 달리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느낀 바가 있어 내 멋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아니, 그때도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세코 씨 입에서 직접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라는 안도감뿐이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소요 시간은 3시간 51분. 좋은 기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혼자서 마라톤 코스를 주파한 것이다. 교통지옥과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와 격렬한 갈증을 극복하고. 이만하면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다만 멀리까지 달려갔다 되돌아오는 코스이기 때문에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피곤하니까 도중에 그만 둘 수 없다. 기어서라도 어떻게든 집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환경이라고 말할 만도 하지만.

 

재능, 집중력, 지속력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그런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들의 유유히 흔들리는 자랑스러운 포니테일과 호리호리한 호전적인 다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페이스를 지키면서 느긋하게 강변도로를 달린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언제가 사람은 패배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내 글로 소화한 것을 사람들 앞에서 실제로 소리내어 말해보면, 거기에서 뭔가를(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마는 듯한 절실한 감각을 느낀다.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자동조종 같은 상태로 몰입해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더 달리고 있으라는 말을 듣는다면, 100킬로 이상이라도 아마 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명상 상태와 비슷한 주법이었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의식이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존재로 다가온다. 의식이 없는 곳에 주체적인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 같은 건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닌 것이다, 라고.

 

(100킬로 완주 후)

몸속에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점점 느슨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지만.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내 몸에 배어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그것이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려 하고 있는지.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겨우 하프 마라톤을 적당한 속도로 달린 정도로 지쳐버린다면, 마라톤 풀코스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오래된 LP를 수집하는 것에 관한 한(아니, 무척) 열성적인 인간인 것이다. 현재 우리 집에 있는 레코드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나로서도 잘 알 수 없다. 세어본 적도 없고, 감히 그런 무서운 일을 하려는 마음조차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척 많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페이스를 지키고 힘을 안배하면서 달렸다.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면서 기분 좋게 코스를 달리고 자 지금부터 페이스를 올려 나갈까하는 지점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지점은 끝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이것만큼은 꽤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다. 좋아 이번에는 잘 달렸다라고 하는 느낌이 회복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앞으로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풀코스를 계속 달릴 것이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이젠 그저 레이스를 마칠 수밖에 없다. 3시간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헤엄치고, 그저 사이클을 타고,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자유형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수영할 수 있었다. 호흡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몸도 부드럽게 움직인다. 도대체 왜 본 경기에서는 이와 똑같이 안 되었던 것일까?

 

그런 이유로 내 트라이애슬론 도전은 일단 4년간 공백을 두게 된다. 그사이 평소와 똑같이 장거리를 달리고, 1년에 한 번 마라톤 레이스에 출전해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마음은 조금도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트라이애슬론에서의 실패가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확실하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나는 이런 일에 관해서는 비교적 집요한 성격이다. 뭔가 잘 안 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잘 될 때까지 납득도 할 수 없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서툴지만, 트라이애슬론 선수들과는 마음 편하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느 쪽이냐 하면, 특수한 인종인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여간해서 정상적인 생활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사람, 기인이라는 말을 들어도 불평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연대감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해도, 따사로운 공통점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는 막연하게, 늦봄 산봉우리에 걸린 옅은 빛깔의 안개처럼 존재한다. 

 

다음 레이스에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 해나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묘비명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제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길 위에서  스쳐 지나며 레이스 중에 추월하거나 추월당해 왔던 모든 마라톤 주자들에게 (나는 나에게 그리고)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만약 그 주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이렇게 계속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걷기의 말들



읽다가 말았음
걷는 이야기인지 달리는 이야기인지 인생이야기인지 음 
달리는 이야기를 보고 싶어서 그만 읽었는데 다른 책만 봄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스트레스가 가라앉는다. 구멍 뚫린 상처에 새살이 돋는다. 

나는 그것을 ‘걷기의 마술’이라 부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 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 볼 만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이 바로 재능이라고.

내리막이라 여기고 지레 포기하거나 멈추지 말 것.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열심히 살아 볼 것. 어떤 오르막이 기다릴까, 잔뜩 기대해 볼 것. 

살길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었어.
또 한 걸음.
언제나 똑같은 그 한 걸음을
다시 내딛고 또 내디뎠지. 

한 발짝도 가지 못할 만큼 힘들거나, 다 포기하고 손을 놓고 싶을 때가 왜 없을까. 그때마다 배를 움켜쥐고 걷던 경험을, 그리고 기요메를 떠올린다. 갈 길이 멀고 고달프고 희망이 없을 때라도,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살길이 생긴다는 걸 배웠으니까. 

그날은 나도 모르게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면서, 한없이 부처님을 찾았다. 목이 메고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그토록 간절히 빌어 본 적이 있던가. 종교가 없는 사람은, 어쩌면 신을 찾을 만큼 절박한 상황에 빠져 보지 않은 게 아닐까. 

안나푸르나에 오면서,
링이 아닌 놀이터에
나를 부려 놓으리라, 결심했다.
죽기 살기로 몰아붙이는 습성을
버리고 가겠노라, 마음먹었다.
싸움꾼의 투지와는 다른 힘을
얻을 수 있겠지, 기대했다.
그 힘으로 내 인생을
상대하고 싶었다.

씩씩대면서 걷다 보니 슬그머니 화가 가라앉았다.  

이런 샤발라! 진작 해 주면 어디 덧나냐?’ 기어 나오려는 욕을 꾹 삼키고, 얼른 지글지글 김치전을 부친다. 오늘 산책도 효과 만점! 

축제, 행진, 시위, 혁명. 죽을 걱정 없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나란히 평화롭게 걸을 수 있는 세상. 그것이 곧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마스다 미리 말이다.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다.  




철학자와 달리기



마크 롤랜즈

 

재미있을 때는 꽤 재미있는데 말이지. 

음. 

뭔가 막 슬프거나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충동으로 그만 읽음.  


22.12.08. 17:43 읽기 시작.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을 덮고

6분의 1지점에서 그만 읽기로 결정. 


우리 조상들의 사냥 전략은 속도가 아니라 인내심이었다. 즉, 큰 무리일지라도 그중 한 마리를 정해 몇 킬로미터가 되든 계속 추적하여 압박함으로써 사냥감이 뛰다 지쳐서 죽게 만드는 전략이다. 

아마 대부분이 이 책에서 내가 펼치는 주장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달리기에 다양한 도구적 가치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순수한 절정의 상태에서 달리는 일은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가치인 본질적 혹은 내재적 가치를 가지게 된다. 어떤 대상이 본질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그로 인해 우리가 얻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에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삶은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는 일을 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또 다른 목적의 수단일 뿐이다. 평생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목적과 수단의 쳇바퀴를 돌며 손에 잡히지도 않는 가치를 좇아 달린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무엇인가를 만날 때 비로소 잠시나마 그 좇음은 끝이 날 것이다. 잠시라도 가치를 좇는 대신 그 속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 질문은 더 친근하고 덜 거창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해 보는 질문인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달리 말하면,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삶에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이며, 살아가는 방식이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반영한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도 있다. 신비로운 대답은 거의 쓸모가 없다. 대답이 대답이 되려면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러한 질문들이 단 하나의 정답만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나는 달리기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달리기는 삶의 본질적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에 우리가 달리면 그러한 본질적 가치를 만날 수 있다. 

어쨌든 이것은 내가 어른이 되고 생활인이 되어 가는 위대한 성장 놀이를 시작하면서 잊어버린 것이다. 사실 성장 놀이 자체를 시작하려면 이것부터 먼저 잊어버려야 한다.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은 가장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인생 최대의 모순이다.

오히려 가끔은 느리고 또 고통스럽게 이어졌던 나의 많은 달리기들처럼, 일반적인 결론의 방향으로 달리려고 애쓰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결국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이 달리기에는 연결되는 길이나 한쪽이 뚫린 골목조차도 없는 막다른 길들이 많이 있다. 가끔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뛰고 또 뛰어 목적지를 알게 되기도 했다. 

나는 보통 이런 상황에서 내가 늘 하던 대로 했다. 바로 기본 원칙을 어기는 것이다.

좋게 말해서 준비가 덜 된 상태로 나는 출발선에 섰다. 금요일 점심때까지만 해도 만약 누군가 내게 달릴 거냐고 물었다면 진심을 다해 “아니요”라고 대답하거나 더 강력한 부정의 뜻을 표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표명한 나의 공식 입장일 뿐 아니라 내 이성에게 말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작은 몸집으로 몰래 비집고 들어온 막강한 영향력의 비이성적인 나는 이미 내가 대회의 출발선에 서 있을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안 될 것이 분명한 이유가 백 가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혹시 몰라서’라는 어설픈 대사를 주워섬기며 새벽 4시 기차에 무거운 몸을 구겨 넣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에 나는 기꺼이 진부한 대답 하나를 툭 내던지고 상황을 모면한다. “그냥 좋아서요.”  

경주를 몇 분 남기고 드는 긴장감도 좋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 놓은 듯한 버거운 느낌 자체도 좋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모르는 이 불확실성도 좋다. 실제로 내 앞에 펼쳐질 예상 밖의 일조차도 ‘좋아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 ‘그냥 좋아서요’라는 대답에는 약간의 진실도 있다. 

진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파악 자체가 어렵다.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도처에서 찾을 수 있는 미국인들의 주문과도 같다. 나도 이러한 믿음을 사랑하고, 많은 미국인처럼 그 가르침이 감동적이고 진실하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아주 확신한다는 게 문제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일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있다. 그리고 삶의 불변하는 진리 중 하나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점 나빠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때는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어제 말할 것도 없이 고통스러운 배드워터, 리드빌, MDS(사하라 사막 마라톤) 같은 울트라마라톤을 끝내고 왔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확실한 것은 우리는 살아갈수록 나빠질 거란 것이다.  

내가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면,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때 역시 다가오고 있다. 

할 필요가 없는 일을 하는 것은 고귀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라고.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꼭 꿈이 이루어진다는 증거나 확실한 상관관계는 없다고. 나는 일해서 좋은 것은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달리기가 최고이자 가장 가치가 있을 때는 일이 아니라 놀이일 때이다. 이것은 내가 달리기를 통해 실제로 얻은 교훈이다. 

종교의 기능은 거짓말을 계속함으로써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과 신중하게 고른 생일 카드의 기능은 진실을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더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은 ‘우리는 살아갈수록 더 나빠진다’는 것이다.  

어떤 무서운 이야기들은 진실이기 때문에 나는 이 마라톤에 나간다.  

주자들은 구간 내에 출몰하는 독사들 때문에 해독제 주사를 상비한 채 달려야 한다. 만약 더위가 질색이라면 콜로라도 록키 산맥의 4.2킬로미터가 넘는 고도에서 약 161킬로미터를 달리는 하드록Hardrock대회도 있다. 깎아지른 언덕을 기어오르는 느리고 힘든 경주로, 영광의 메달과 함께 고산성 뇌부종이 상품으로 따라오는 지옥의 코스이다.  

“얘야, 언젠가는 이 가게의 사탕을 모두 살 수 있단다.”
“정말요, 하나님?”
“그럼, 정말이지. 그런데 그때가 되면 아마 사탕이 먹고 싶지 않을 게다. 그게 바로 인생이란다!”
어떤 가치가 있는 성취도 성취하는 순간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기적이 일어나 내가 정말로 이 마라톤을 완주한다 해도, 사우스 비치에서 모히토 파티나 벌이며 축하의 늦은 브런치를 먹는 게 고작일 것이다. 

내게 있어서 성취란, 내가 하는 일이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만드는 과정에 불과하다. 나는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관점에서의 성취를 목표로 뛰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성취의 과정에 의해 변화되기 위해 뛸 뿐이다. 물론 성취하는 과정에 의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취를 해야 한다. 그러나 성취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나는 변화하고 싶어서 달린다. 그러면 “어떻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에 따르면, 자유로워지는 것은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도교에서는 자유를 무위無爲, 즉 인위적 행위가 없는 상태와 동일시한다. 고속 스포츠에서는 ‘영역’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인다. 상황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행동을 정확히 해내는 것이다. 선수의 행동은 필요와 완벽히 일치한다. 즉, 해야 할 일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는 것이다. 

장거리 달리기에서 거리를 늘려 나가는 것은 육체를 속이고 설득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성공적인 달리기의 정신은 가끔은 필요에 의한 거짓말이다. 인내심의 저변에는 자기기만이 있다. 

6분의 1지점에서 그만 읽기로 결정.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

 

제목과 주제도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함.

재미있을 때는 꽤 많이 재미있는데,

몰입 이야기만 나오면 지루해져서 1/4즈음 읽다가 말았음.

뒤에는 재미있어지려나? 그러면 안되는데. ㅎㅎ

후기를 찾아봐야겠다. 

 

 

 

조금 우습지만,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계기는 하루키였다. 달리기는 소설을 쓰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다고 한 그의 에세이를 읽고, 나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뛴다고 바로 글이 잘 써지지 않았지만, 스트레스는 풀렸다. 이후 안 풀리던 과제가 있어도 달리고, 직장 상사가 괴롭혀도 달리고, 아침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달렸다. 달리는 동안 내 일상을 방해하는 것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솔직히 말하면, 여전히 달리기는 귀찮고, 힘들다. 하지만 어느덧 습관이 붙었는지 아무리 진료가 힘든 날이었어도 그날 저녁에 30~40분은 쉽게 뛸 수 있다. 그러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고, 잠도 잘 온다. 울적한 기분을 날리는 데 이만한 게 없다. 


자주 몰입하는 사람일수록 더 행복하게, 더 큰 성취감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달리기를 하면 몰입을 경험할 기회가 매우 많다.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아주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대부분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생애 최고의 순간들은 수동적이거나 수용성이 크지 않을 때, 혹은 편안할 때 찾아오지 않는다. (중략) 최고의 순간은 까다롭고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의 신체 혹은 마음을 한계 수준까지 확장시킬 때 찾아온다.

수많은 연구 결과를 종합해 사람들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경우에만 돈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결론지었다Dunn, Gilbert & Wilson, 2011. 그와 같은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는 경험이 행복에 중대한 영향을 주고, 경험의 질 또한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목적의식이 높아지고 타인과의 관계가 개선된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더 큰 행복을
느낀다. 적극적인 참여가 행복의 핵심임을 명확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이 몰입을 경험한다고 밝혔다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어떤 활동이나 여가 등을 즐길 경우 목표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들은 수동적인 사람들보다 그 일에 푹 빠져들어 자기 자신과 인생에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런 결론은 우리의 직관적인 생각과 다소 상반된다. 대다수는 휴식을 취하고 쉴 때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이 주어지면 무언가에 푹 빠져 있거나 어떤 과제를 해결하느라 몰두했을 때라고 ‘응답’하는 경우가 더 많다.

지금 이 책을 집어든 독자들은 열정적인 달리기 애호가일 텐데,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행운아다. 달리기만큼 개인의 성장과 몰입 기회가 큰 스포츠는 거의 없다.

장거리달리기나 험한 길을 규칙적으로 한참 뛰다 보면 달리기가 끝날 무렵에 찾아오는 이 현상은 때때로 인터벌 트레이닝 중에 찾아오기도 한다. 희열이 물밀듯이 몰려오고, 훈련의 고통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생각이 조금 더 맑아지고 깊어진다. 다리에 느껴지던 고통도 사라지고 영원히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마치 그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기분은 달리기를 멈춘 후에도 지속된다. 몇 시간씩 이어질 때도 있다. 이러니 ‘러너스 하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최근 연구에서 러너스 하이라는 명칭과 꼭 어울리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현상을 일으키는 두 가지 주된 화학물질이 엔도르핀(모르핀과 유사한 오피오이드[아편제]의 일종으로, 중추신경계에서 생성된다)과 엔도카나비노이드(마리화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희열감을 느끼는 이유는 THC라는 성분 때문인데, 엔도카나비노이드는 인체에서 만들어지는 THC에 해당한다)라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화학물질은 인위적으로 합성된 물질과 달리 정신
건강 측면에서 나타나는 긍정적인 결과와 관계가 있으며 생리학적인 중독이나 의존성을 유발하지 않는다Fetters, 2014.
엔도르핀이 천연 진통제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전두피질 등 우리 몸의 특정 부위에서 분비되어 혈류로 유입되는 것은 장거리 달리기 중에 발생할 수 있는 외상에 대처하기 위한 당연한 반응임을 알 수 있다. 엔도르핀이 아편제 수용체의 결합 부위와 만나 결합하면 통증이 사그라들며 다른 모든 마약성 진통제와 마찬가지로 행복감을 증대시키고 스트레스가 신체에 끼치는 영향도 약화시킨다. 

달리기를 할 때 엔도카나비노이드가 만들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이 제기되어왔다. 가장 유명한 이론은 인류가 수렵과 채집 활동으로 생존하던 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진화적 부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식량을 구하려면 열량을 추가로 태우고 다칠 위험도 감수해야 하므로 이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설이다Gleiser, 2016. 개를 비롯해 장거리를 이동하며 먹이를 구하는 다른 동물에게서도 인간이 장거리달리기를 할 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화학적 반응이 나타난다. 또한 이와 같은 반응은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할 때만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걸을 때에는 엔도카나비노이드의 생성량이 증가하지 않는다.
러너스 하이를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화학물질은 그날그날의 훈련 수준에 따라 좌우되며 다른 수많은 생리학적 요소의 영향도 받는다. 때로는 달리면서 날아다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만, 몸이 축축 처져서 얼른 끝내고 싶을 때도 있다.
러너스 하이와 몰입은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뇌의 화학반응에 일부 동일한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몰입은 심리사회적 요인에 더 큰 영향을 받고, 더 오랜 시간 한 가지 특정 목표에 집중할 때 나타나는 결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러너스 하이는 화학반응에 해당하며 별다른 노력 없이 효과가 지속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런 차이와 별개로 러너스 하이는 중요한 현상이다. 몰입은 수개월, 심지어 수년간의 훈련을 거쳐야 느낄 수 있는, 손에 잘 잡히지 않는 경험인 경우가 많다. 반면 러너스 하이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조금만 노력하면 보상으로 얻을 수 있다. 또한 러너스 하이를 꾸준히, 충분히 오랜 시간 느끼다 보면 궁극적으로 러너스 하이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몰입을 경험할 가능성이 크다. 

노력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거나 수동적인 활동과 정반대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 더 큰 만족감을 느낀다.
수동적인 삶은 장기적으로 좌절감과 불안을 유발한다.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목표와 성취 가능한 도전 과제, 그리고 정확한 피드백이 반드시 필요하다. 

목표가 너무 높으면 불안감이 더 커지고 목표가 너무 낮으면 지루해지는 동시에 달리기를 계속하려는 욕구도 시들해진다.

지금 하는 활동에 중요성을 많이 부여할수록, 즉 더 중요한 가치를 우선시할수록 난이도가 높지 않아도 몰입을 경험할 가능성은 커진다.

목표가 비현실적이거나 애매모호할 때, 도전 과제가 감당하기에 벅찬 수준이거나 너무 시시할 때, 달릴 때마다 피드백이 달라지는 경우에는 몰입 가능성이 작아진다. 

자신을 상대로 경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 못지않게 몰입을 유도하는 힘이 강력하다. 

완벽주의자는 항상 능수능란하게 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행위나 행동을 과도하게 엄격한 눈으로 바라본다. 심하게 비판적인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정신이 산만해지고, 자신이 이룩한 훌륭한 결과에 주목하기보다 남들이 이룬 큰 성과에 집중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의식을 내려놓거나 차분해지기가 어렵다.

몰입은 세 가지 선행 단계와 여섯 가지 처리 결과를 합한 아홉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선행 단계에는 명확한 목표, 해결 과제와 기술의 균형, 정확한 피드백이 포함되며, 처리 결과는 주의집중, 행동과 인식의 융합, 통제력, 자의식의 상실, 시간 개념의 왜곡, 자기 목적성(내적 동기부여)로 이루어진다. 


그만 읽을래. 211/890

달리다 보면, 김승, 김유진, 백인성, 석원, 손우성, 조덕연

 

나름 재미있는 구석이 있음. 

술 잘 마시려고 달리는 이야기가 특히 재밌는데 나는 안 됨. ㅎㅎ

난 술이 안 쎄짐. 

해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 같음. 



즐거움으로 달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슬픔을 잊고 괴로움을 떨쳐 내려 내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더욱 길 위의 달리기를 응원하고 싶다. 내딛는 한 발 한 발에 즐거움은 더해지고 아픔은 덜어지기를, 몸뿐만 아니라 마음 근육도 단련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이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달리고 있을’ 이들을 떠올린다. 길 위가 아닐 뿐 사실 우리는 늘 달리고 있었다. 때마다 인생과업은 주어졌고, 이를 수행하려면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보통과 평범의 자리를 원할 뿐인데도 숨이 찼다. 앞선 이의 뒷모습을 보며 좌절을 겪고, 때로 다시는 달리지 않을 것처럼 오래 쉬었다. 경로를 바뀌기도 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달려 여기까지 왔다. 아, 이렇게나 훌륭한 러너들이라니! 오늘의 기록이 썩 좋지 않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말자. 이미 충분히 잘 달려왔고, 무엇보다 인생 달리기에선 속도가 전부가 아니라고 알고 있다. 

나는 뛸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술잔을 앞에 두고 술판에서 달리기를 택했다. 

그저 3km 정도를 조금 빠르게 걸었을 뿐. 조깅 정도의 속도로 뛴 첫 경험이었다. 이것이 내 길고 긴 달리기의 시작이다. 그날 저녁, 전날보다 술은 달았고 잠도 잘 왔다. 심지어 다음 날 숙취도 없었다. ‘이것이 달리기의 힘인가’ 생각하며 남은 출장 기간의 모든 아침을 달렸다.

나에게 아침 달리기는 세상의 건강함을 만나는 기회였다. 모든 러너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하루를 살아갈 새로운 힘을 달리기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달리는 순간을 바탕으로. 

어느 순간 무념무상에 이를 수 있는 건 달리는 순간에 맛볼 수 있는 찬란한 경험이다.  

달리기 싫어질 때마다 나에게 동기 부여가 됐던 달리기의 효험은 바로 ‘밤의 달리기’가 쉬워졌다는 거다. 달리기는, 밤의 술자리에서 빛나는 효과를 보여 주었다. 

아침의 달리기가 불러온 밤의 달리기의 변화! 아침에 달린 만큼 밤의 달리기는 즐거웠고, 덜 힘겨웠으며, 아침에 흘린 땀 이상의 수분(?)이 몸에 부드럽게 흡수되는 경험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선택은? 뭔가 하나의 고통을 참는다면 술자리를 피하는 고통보다, 아침 기상의 고통을 참기로 했다. 조금 힘들더라도 숙취 해소 방법의 하나로서 달리기를 선택한 것이다.

어디를 달리더라도 내가 만족한다면 그 코스는 나에게 최적의 코스다. ‘달리기 좋은 곳’은 없다. 그저 달리다 보면 그곳이 어느 순간 좋아질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달리다 보면 곁에 함께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순간마다 무시할 수 없는 크기로 자리한다. 한 걸음을 더 빠르고 힘차게 달릴 힘이 이런 함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뛰는 사람’이 되리라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하곤 한다. 나 역시 그 의견에 200% 공감한다. 

달리는 가치가 돼 주는 함께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이 좀 더 많아진다면 우리 삶은 여러 의미에서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달리기가 싫어질 때, 힘겨울 때, 지칠 때, 포기하고 싫을 때, 그땐 사람이 답이다. 

겨울, 우리의 끝을 보며 시작을 향하기에 달리기만 한 것이 없다.




마라톤과 영양 섭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선수들은 마라톤 대회를 위해 ‘카보로딩’이라는 영양식단을 진행한다. 짧게는 2시간, 길게는 5시간이 소요되는 레이스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쓰기 위해 대회 약 일주일 전부터 몸에 영양소(주로 탄수화물)를 축적시키는 식단이다. 

일반적으로 ‘트레일 러닝’은 산에서 달리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는 ‘포장되지 않은 모든 길’을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달리기에서 손이 하는 역할이 크다. 이왕 운동을 제대로 해 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하게 되는 일은 바로 쇼핑이다. 

달리기에서 제일 중요한 아이템을 꼽으라면 신발이다. 추가로 땀을 잘 흡수하는 기능성 운동복과 스포츠 속옷이 있으면 더 좋다. 이뿐인가? 발바닥을 보호할 도톰한 스포츠 양말도 필요하다. 하나만 있어서 되겠는가? 혹여나 매일 운동할지도 모르니 장바구니에 종류별로 색깔별로 두세 개 더 담는다. 달리다 보면 무릎이 아프니까 무릎 보호대(무릎이 두 개라서 보호대도 두 개), 핸드폰을 들고 뛰기 번거로우니 허리벨트, 이왕 이렇게 된 거 핸드폰 대신 스마트 워치, 여름철 뜨거운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모자, 피부에 흐르는 땀과 열기를 식혀 줄 쿨링 타올, 겨울엔 장갑과 넥워머, 털모자, 귀마개까지. 달리기에 필요한 아이템이 이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다시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태 이렇게나 많이 사들였을 줄이야! 

매일 비슷한 곳을 달려도 늘 새 옷이고 신상이다. 

뛰면서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가 자신에게 맞는 속도이며, 그때의 호흡이 가장 편하다는 것이다.  

달리기를 마친 후 성취감을 줄줄 흘리며 집으로 오면 비로소 그냥 김유진의 스위치가 on 되었음을 느낀다. 이 시간들이 매일 조금씩 모인다는 건, 단순히 달리기 누적 거리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몸도, 정신도 점차 두꺼워지고 단단해지고 있다. 

달리기에 집중하다 보면 그날의 거친 시간들이 산책로 위로, 한강으로, 바람 속으로 밀어 내진다. 



언제고 모든 이유의 이유가 되는, 달리다 보면 마주하는 저 밑바닥에 깔린 나만의 달리는 이유는 분명히 존재한다.

성적으로 특별함을 얻는 일이 끝이 없고 소모적이라면, 성적과 관련한 모든 시스템 자체를 답답하고 고루하게 여기는 것으로 위안을 얻고자 했다. 그렇게 다른 이들과 달리 암기와 반복의 차원을 넘어 어떤 심오한 영역을 추구하는 사람, 입시 제도에 담길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면 했다.  

부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다. 무수한 달림과 멈춤 사이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거리와 속도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몰아쳤다. 더는 남은 체력이 없고, 모든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신호들이 발목으로부터 서서히 올라왔지만 멈추기 싫었다. 아직 숨이 일정하다며, 다리는 어떻게든 따라올 수 있다며 이를 악물었다. 

달리기는 그리 많은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웬만한 상황이면, 언제 어디서든 첫발을 떼기만 하면 된다. 쉽고, 상대방이나 팀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시작할 수 있다.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특히, 밤에 홀로 야외 공원을 달리면 온 세상이 나라는 존재로 꽉 채워진다. 나의 고민과 감정들, 숨소리와 심장 박동, 땀, 근육통, 흘러내리는 안경, 그 밖의 모든 것들로. 

그저 구색을 맞추려 형식적으로 돌았던 트랙 한 바퀴, 그 몇 분 사이에 그녀는 그만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여느 별똥별과 같이 자신의 궤도를 벗어나 존재를 불사르며 누군가에게로 다가가는 것도, 또 누군가가 나에게 그렇게 다가오는 것도 저 멀리 소원을 비는 일만큼이나 아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나는 오늘도 어딘가를 향해, 무언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실연당하면 난 조깅을 한다. 조깅을 하면 몸속의 수분이 빠져나가서 눈물이 잘 나지 않는다. 

늘 이유를 찾는 게 먼저인 사람들 사이로, 포레스트는 계속해서 뛴다.

사랑을 위해 뛰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달릴 수 있나요, 그런 당신의 달리기는 무슨 맛인가요? 


달리기에 대한 마음의 벽을 가장 많이 허물어 준 영화는 <아워 바디>다. 

삶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쌓이는 근육이라는 게 분명 존재한다. 

별다른 의미 없이 시작한 달리기가 삶에 의욕을 가져다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내가 행복하다면 그것은 가장 큰 명분이자 이유가 되어 준다고. 내가 행복하면 그걸로 된 거라고. 

제자리에서 뛰어도 뛰기 전보다 뛴 후가 더 발전적인 것처럼, 하루하루 살아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더 나아진 거라고 믿는다.

주변을 열심히 둘러봐도 시간과 비례한 결과를 보여 주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달리기는 투자한 시간 대비 명확한 변화를 보여 준다. 숫자로 판단되는 세상이 지긋지긋하지만, 내 몸이 만들어 낸 기록은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걸 가장 정직하게 정량화해서 보여 준다. 마음 같지 않은 세상에서, 달리기가 만들어 내는 변화는 즉각적이고 가시적이다.  

오늘부터 달리기를 합니다. 이진이(지니코치)

 

별 내용은 없음. 

뭐랄까.

유튜브에서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랄까. 

한번 훑어보는 정도로는 괜찮음


달리기는 정말 정직한 운동이라는 걸 다시 느꼈거든요. 

여분의 러닝화를 두고 번갈아가며 신는 것이 좋습니다. 러닝화 하나만 주구장창 신다 보면 쿠션이 원래 상태로 돌아올 틈 없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쿠션도 우리 몸의 근육처럼 회복할 시간이 필요해요. 

겨울 - 얇은 옷을 여러 벌 껴 입으면 체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됨. 장갑, 워머, 귀마개 등 부위별로 체온을 보호할 수 있는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발목이 약하거나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라면 힐풋으로 시작합니다. 틈틈이 오르막 달리기나 줄넘기를 하며 미드풋 착지법을 익히는 것이 좋습니다. 무릎이 약하다면 미드풋으로 시작합니다. 미드풋 주법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힐풋으로 달리면서 중간중간 미드풋으로 바꿔보며 적응해나갑니다. 

운동 전 동적 스트레칭, 운동 후 정적 스트레칭


30일 5분 달리기, 김성우 지음

 

이 책은 달리기에 의무감을 느낄 때, 

더 빨라지고 싶어서 무리하고 있다고 느낄 때,

달리기에 부담을 내리고 싶을 때 읽을만함. 광고스럽기는 하지만. ^^;;



사실 저는 우울해서 달리기를 시작했습니다. 

끝이 없는 어둠으로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달리기가 그 어둠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만큼은 어둠의 끝에 빛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어요. 달리는 순간들만큼은 부정적인 생각들이 멈추고, 살아 있는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는,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대학원 마지막 학기 중이어서 졸업준비, 취업준비에 더해 일주일에 100km 이상을 달렸더니 결국 몸과 마음이 ‘완전연소’되는 번아웃이 왔습니다. 막 잠에서 깨어나 ‘달리러 나가자’ 하는데, 몸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더라고요. 달리기가 아무말 없이 이별 선언을 하고 떠난 거였죠. 

 

일단 문 밖으로 나가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달리기를 하는 것에 집중했어요. 달리는 거리, 속도에 속박되지 않은 채, 달리는 움직임 그 자체를 관찰하고, 다시 경험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예전처럼 강박을 갖고 기록을 목표로 거리나 속도를 기준으로 무작정 달리는 것을 자제했어요. 달리고 싶으면 달리러 나갔고, 달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누워서 쉬거나 요가를 했습니다.

 

호흡이 편한 속도로 달리는 것이, 호흡이 힘든 속도로 달리는 것보다 장거리 달리기 능력을 키우는 유산소 시스템의 발달을 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하루 무리해서 많이 달리고, 다음 날에 아예 달리지 못하는 것보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달리는 것이 꾸준한 달리기 습관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봄과 가을에 달릴 때 마지막으로 주의해야 할 점은, ‘너무 기분이 좋다고 무리하지 않기!’입니다. 

 

겨울에 달리다 보면 특유의 정적을 마주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 아침/밤에 달리면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조용한 삶의 생동감과 자유가 느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도 하면서 달렸어요. 달리다 보면 제 안에서 대답을 듣기도, 위로를 받기도 해요. 그날 이후 머리가 복잡할 때는 종종 노래를 듣지 않고 달립니다. 달리며 질문을 해요. 대답이 안 떠오르면 그냥 달려요. 달리면서 대답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달리면서 경험하는 변화와 느끼는 것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게 됩니다.

 

더 빠르게, 멀리 달리고 싶다면, 더더욱 무리하지 마세요. 빠르게 멀리 달리는 데에 필요한 기반은, 편하게 달리는 시간 속에 쌓입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요. 

 

시간을 기준으로 달리는 것은 속도와 거리에 대한 강박 없이 나만의 달리기를 즐길 수 있게 합니다.

 

달릴 때마다 케이던스를 빠르게, 또 느리게 해 보면서, 나에게 가장 편한 케이던스,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 보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꼭 180에 맞출 필요 없습니다. 오늘, 내 달리기를 더욱 가볍고 쉽게 해 주는 나의 리듬을 찾아가며 달려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달리기를 하다 보면 내가 할 수 없던 달리기를 하게 된다.

 

머리와 목, 어깨만 앞으로 나가서 기울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척추를 길게 유지한 상태에서 몸 전체가 앞으로 ‘떨어지듯’ 기울어지는 것을요. 

 

뒤꿈치가 아닌 앞발이나 중발로 착지하세요.

 

느리게 뛰어도 괜찮아! 중요한 건 너의 달리기를 하는거야.

 

달리기를 마치면 뭘 할까? 어제 재미있었던 일, 짜증났던 상황 등등 달리는 동안 끊임없이 나와 대화하면 나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더욱 깊게 알아 갑니다. 뜬구름 같았던 행복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삶은 더욱 활기차집니다. 5분 달리기는 저에게 동적 명상 시간입니다. 

 

달라진 사람들은 변화를 상대적으로 쉽게 도모할 수 있는 사회 집단에 속한 덕분에 변할 수 있었다.

 

동력 러닝머신에서 달릴 때는 기울기 0~10단계 중 최소한 3으로 놓고 달리시기 바랍니다. 언덕 달리기 훈련의 효과를 얻고 싶다면 최소 6 위로 놓고 달려 보세요. 몸이 알아서 코어와 엉덩이 근육들을 제대로 사용하며 더욱 효율적인 달리기 움직임을 만드는 것을 경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서둘러 달리기 실력을 늘리고 싶어서 서두르는 자신이 보인다면, 너무 열심히 하지 마시기 바랄게요. 절대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까지 숨이 차서 헉헉거리며 억지로 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래, 건강히 달리고 싶으시다면  자주, 편하게 달리세요. 달리는 시간, 속도, 거리는 저절로 늘어날 겁니다. 거짓말 같기도 하죠? 하지만 사실입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 나를 아껴 주는 사람들이 떠오르면 그들의 건강과 안녕을 바라며 한 발 한 발 달리곤 했습니다. 

 

오늘도 함께 ‘나를 위해’ 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것은 모두 잊어도 달린 후에 차가운 음료를 마시지 말고 따뜻한 물, 꿀물 혹은 밀크티를 꼭 드셔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달리는 이유를 명확히 하고, 나 스스로에게 되뇌어 보면 달리기가 조금 힘들어질 때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됩니다. 당신이 달리는 이유가 무엇이든, 그 이유를 붙잡고, 나만의 달리기를 이어가 보세요. 결국에는 아무 이유 없이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달리기도 가능하게 될 겁니다. 

 

잘 달리는 방식을 몸에 익힐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오르막 언덕을 자주 달리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이나 걷는 데에 무리가 없고,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아니라면, 부상보다는 성장통일 확률이 높습니다. 부상이 아니라면, 이것을 ‘성장의 신호’로 인식하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꾸준히 이어가는 마음을 가져 주세요. 

 

욕심과 포기 사이에는 꾸준함이 있습니다. 너무 열심히 하다가 제풀에 지치지 마시고, 또 성장통에 힘들다고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꾸준함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느끼기에 약간 어색할 정도의 빠른 리듬으로 달리는 것이 착지할 때마다 몸이 받는 충격의 크기를 덜고 달리기 경제성도 향상시킵니다. 미국 위스콘신주 고등학교 육상 선수들 68명의 케이던스와 무릎 부상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한 논문•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케이던스로 달리는 선수들이 그보다 높은 케이던스로 달리는 선수들에 비해 정강이 부상과 무릎 부상을 경험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무릎과 발목이 무리하지 않게 달리기

 

  첫 번째로 내가 무리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달리기의 시간과 주기를 아셔야 합니다. 나를 위한 달리기 습관을 만드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무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코로 호흡해도 편한 속도’로 달리라고 조언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로 착지할 때 발목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만들 경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착지는 리듬, 기울기 등을 통해 몸이 저절로 드러내는 것이지, 내가 의도적으로 생각하며 발목에서 만들어 내려고 하면 발목에 무리가 가고 더 나아가 무릎, 고관절도 무리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몸의 각 부위들이 함께, 또 각자 잘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운동들을 일주일에 적어도 2, 3회 해 주면 좋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땅을 뒤로 밀어야 한다는 단순한 교훈을 얻게 되었죠. 

 

익숙한 지면에서만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도 천천히 몸을 적응시켜 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지면에서 달릴 때 몸은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을 만들어 내고 학습하기 때문이죠. 

 

파틀렉 훈련은 ‘시간’을 기준으로, 그 시간 동안 ‘빠르게’ 달리고, 또 ‘천천히’ 달리는 것을 반복하는데요. 여기서 ‘빠르게’와 ‘천천히’의 속도를 그날 나의 컨디션에 맞춰 조정할 수 있습니다. 무리하지 않으면서 속도와 지구력을 늘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줘요.  

 

무리하기 쉬운 훈련이어서, 일주일에 최대 1회 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처음에는 3회 정도까지만 해 보시고, 매주/격주마다 반복 횟수를 1~2회씩 늘려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빠르게 달리는 시간은 2분, 3분, 4분, 5분까지 늘리셔도 좋습니다만, 천천히 달리며 회복하는 시간은 1분으로 고정하는 걸 추천합니다. 

 

생각해서 하는 고마운 조언인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데 자신이 정해 놓은 한계가 다른 사람에 의해 부서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강요하는 한계보다, 내가 나에게 정한 한계들이 훨씬 강력하고 무섭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 나의 달리기 한계점을 생각하세요. ‘30분 달리기… 해 보고 싶은데 너무 어려울 것 같아… 내가 할 수 있을까?’와 같은 생각이 드는 달리기 지속 시간의 지점을 찾아봅니다.

 

그 한계 시간을 찾으셨다면, 앞으로 5일 이내에 그 시간을 꼭 달려보겠다는 마음을 먹어 보세요.

 

그리고 정말로 5일 이내에, 이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꼭 해 보시기 바랍니다. 달리는 속도는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목표한 시간을 다 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일주일 후에 다시 시도해 보세요. 그때도 하지 못했다면, 일주일 후에 다시 시도해 보세요. 결국 성공하는 날이 올 겁니다. 한계를 마주하고, 도전하지 않았다면 경험하지 못할 성과죠.

 

내가 정한 한계를 뛰어넘는 달리기를 꼭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달리기를 하기 전에는 술에 의존해서 이 감정들을 회피했었는데, 지금은 달리기를 통해 제 감정을 돌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러너는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온몸으로 발버둥치는 존재다.

 

러너로서 추천하는 책은 〈달리기와 존재하기〉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천복(天福. 산스크리트어로 Anand, 영어로 Bliss)은 하늘이 내려 주는 복이다. 캠벨에 의하면 천복은 가슴이 하는 말,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달릴 때마다 세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달리기는 의미를 초월하는 순간으로 나를 초대했습니다. 달리면서 나는 비워지고, 새로워졌습니다. 달릴 때면 ‘나’는 시간과 기억의 흐름을 벗어나 자유로움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사랑받고 사랑 주는 하루이길 바라 봅니다.

 

‘아, 달릴 수 있어서 참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이렇게 마음먹으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삶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다른 무엇으로는 얻을 수 없는 평온한 에너지와 충만함을 주는 달리기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입니다.

 

달리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과 감정들은 거리, 속도, 기록 같은 숫자로는 환산될 수 없다는 것을.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더 빨리, 더 멀리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행복하게, 자유롭게 달리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달릴 날들은 정말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요. 



달리기는 제가 하루키보다 낫습니다

 

 

달리기가 인내와 의지의 영역이 아니라 재미와 쓸모의 영역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요.

 

어느 순간부터 삶의 지혜와 새로운 나를 툭 던지기도 하더군요. 다시 시작한 달리기는 그렇게 스스로 진화했습니다. 

 

이젠 사람들이 달리기를 그만두는 이유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달리기의 진화’를 알기 전에 멈춘 것입니다.  

 

아내가 반대하는 취미생활은 백해무익합니다. 

 

무릎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드로메다로 출장 간 상태였다.

 

이마에 땀이 난 순간 알 수 없는 쾌감이 나를 휘감았다. 

 

수영을 할 때는 땀이 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땀은 달리기만의 매력이었다. 

 

32km를 지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무릎이 고장 났고 330은 조금씩 멀어졌다. 다리는 펑크 난 타이어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그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솟구치는 통증을 억누르고 몇 번이나 달리기를 시도했다. 더해지는 건 고통일 뿐 걷는 속도는 전혀 더해지지 않았다. 타이어가 펑크 나면 교체라도 하겠지만 다리를 새것으로 교체할 수는 없었다.

  330은 완전히 떠났지만, 완주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한쪽 다리는 끌고 한쪽 다리는 끌려갔다. 부끄러웠지만 걸었고 더 부끄러울 수 없어 완주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최종 기록은 목표한 기록보다 44분이나 늦은 4시간 14분을 찍었다.

  대회는 끝났지만 무식함과 과욕이 부른 참사는 현재진행형이었다. 마라톤이 끝났으니 부상도 함께 끝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나는 나야. 나는 다르다고. 내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겠어.”

  결과는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목표 달성 대신 인간은 모두 같은 몸뚱이를 가진 존재라는 교훈을 얻었다.

 

달리기만 하면 언제든 몸무게를 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야구와 달리 그다지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나가서 달리면 기분이 좋았지만, 막상 나가기 전까지는 의지의 몫이었다. 



클럽 가입을 권한 지 보름쯤 지났을 때 그가 정기모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가 없었다. “이럴 거면 내가 권했을 때 가입하든지….” 

시간은 모든 섭섭함을 날렸다. 우리는 함께 달리는 시간을 쌓아가며 거친 호흡과 굵은 땀방울을 공유했다. 우리는 함께 달리면서 웃고, 달리기를 주제로 대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가볍게 때론 격하게 서로를 격려하며 선의의 경쟁이라는 씨앗을 마구마구 뿌렸다. 누구보다 까칠하던 그는 세상에서 가장 살가운 사람이 됐다. 달리기 친구가 된 그는 ‘홍시기’다.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라 미리 알려둔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여자는 프러포즈하는 남자에게 승낙 대신 웃음을 주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동네 형에서 달리기 친구가 된 올레는 요즘 PD 생활을 청산하고 달리기 유튜브 〈마라닉TV〉를 개설했다. 예전부터 꿈꾸던 본인만의 진짜 영상을 만들고 있다. 

 

무엇이든 어디서 어떻게 하느냐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함께 달릴 친구가 있다면 누구라도 더 멀리 더 자주 그리고 더 빨리 달릴 수 있다. 

 

세계적인 작가가 러너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루키의 책 제목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며칠 뒤 그 책을 단번에 읽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 달에 300km를 뛰어본 적이 없는데 하루키는 수시로 그렇게 달렸다. 그는 예상을 뛰어넘는 대단한 러너였다.

 

달리기는 사랑과 달리 뜨겁지도 않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운동은 즐기기 위한 놀이에서 시작했지만 달리기는 잡거나 잡히지 않기 위한 생존에서 시작했다. 

 

흔들다리 효과.

안정된 다리보다 흔들리는 다리에서 만난 이성에게 더 끌린다는 결과가 나왔다. 흔들리는 다리 위라서 심장이 뛰는 건데 뇌는 이성 때문에 설렌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달리기로 생기는 ‘흔들다리 효과’는 여행을 더 사랑하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걱정은 미리 할 필요가 없었다. 부딪히면 저절로 해결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첫 구절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이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모든 조건이 맞아야 하고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 이유로 불행하다는 뜻이다. 

 

여행하다 보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은 신비한 날을 만날 때가 있다. 여행에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과 사진으로 남기지 않는 모든 추억은 돛단배처럼 아스라이 사라진다. 

 

호수가 품은 모든 장면은 분명 사랑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뿜어낼 수 있을까? 

 

금요일은 원래 발걸음이 가볍지만, 그날은 하체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흡사 〈고스트 바스터즈〉에 등장하는 유령이 된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 달리다 보면 멈추고 싶은 순간이 있다. 숨이 차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을 더 느끼고 싶어서다.  

 

새삼 고마워 홍시기를 바라보며 웃었더니 그도 웃으며 물었다.

  “왜?

  “좋아서요.”

 

제주에서 마시는 한라산은 지극히 색다르다.  

 

여전히 다리가 불편했다. 아내가 물었다. “그거 또 할 거야?”

  “어, 해야지” 대답하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달리면 급격히 친해진다. 굵은 호흡을 쏟으며 함께 달리면 마음의 벽이 얼음 녹듯 사라진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전적으로 나의 경험이다. 나는 이것을 달리기가 만드는 작은 기적이라 생각한다. 작은 기적은 천천히 달릴 때만 누릴 수 있다. 빨리 달릴 때는 나에게 집중하니 주위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어느 여성 러너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저 좀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같은 러너로서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돼 안아주었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고마워요, 다시 끝까지 달릴 거예요.”

  사람이 힘겨워할 때는 아무 말 없이 어깨를 어루만져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몇 년 전 꽤 괜찮은 선물을 알게 됐다. 어느 여행지에 갔더니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송되는 방식이었다. 호기심으로 엽서를 써 우체통에 넣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1년 뒤 엽서가 왔다. 엽서가 특별히 예쁘지 않았는데도 대단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때부터 엽서를 특별한 선물로 정했다. 



그때 열정적인 근육 청년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무중력 상태로 달렸다. 달리기에 몰입해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달리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은 혼자 달리면 지루하고 심심하지 않냐고 묻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경우는 드물다. 혼자 있는 시간이 무작정 외롭지만은 않은 인생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 달리고 싶은 날이 있는데, 그런 날의 문제는 함께 달릴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다.



팍팍한 살림살이로 매생잇국을 못 먹어봤다고 지원서에 썼거든요….”

 

  그 일화를 본 순간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구본형 작가의 인품에 탄복했다. 제자들은 그를 말과 글이 일치한 사람이라고 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천재는 나면서부터 알고 수재는 배워서 알게 되지만, 나처럼 보통 사람은 경험해서 알게 된다. 좀 늦을 수 있지만, 결과는 같다. 긴 인생을 봤을 때 조금 빠르고 늦는 건 어쩌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용에 나온 이 문구조차 나는 경험으로 알게 됐다. 

 

나의 다짐은 이렇게 변화무쌍해서 때론 바위 같고 때론 깃털 같다.

 

항상 최선을 다해 달릴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최선을 다해 달리겠다고.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러너다운 달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달려내는 것이다. 기록은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그가 만약 똥을 싸면서 완주하지 않고 포기했다면 스웨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그는 결국 최고가 된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향한 열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금지된 사랑도 그렇지 않던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보다 할 수 없는 사람을 배려할 때 세상의 온도는 사람의 온도가 될 것이다. 



한밤의 운동장 달리기

다이어트 책인줄. ㅎㅎ

 

 

 

삶은 고통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이었어요. 

자연스러운 것은 포만감이 아니라 바로 허기예요. 

삶은 행복이다. 삶이 고통이라는 진실을 아는 사람에게는. 

 

 

책상 생활자를 위한 달리기 생활

 

지기만 하는 일이 재미있을 리 없다. 재미없으니 안 하게 되고, 안 하니까 못하게 되고, 못하니까 또 재미가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그랬던 운동무능력자 소년이 커서 마라토너가 되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손으로 등 뒤를 밀어주듯이 눈빛으로도 밀어줄 수 있는 거구나. 응원을 받으면 힘이 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알게 됐다. 

 

마라토너는 42km를 달리는 동안 무릎을 규칙적으로 쉬지 않고 접었다 폈다 한다. 한 번에 뛰는 걸음은 1m쯤 되니까 대략 4만 번. 왼쪽 오른쪽 각 2만 번씩. 이래도 안 망가지는지, 고장 안 나고 이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지 시험해보는 것처럼 2만 번을 접었다 폈다 하는 거다.

 

34km쯤 되는 지점이었다. 점프가 전혀 안 됐다. 1mm도 안 됐다. 걷는 것만 겨우겨우 됐다. 뛰려는 마음과 뛰어지지 않는 몸, 그 사이의 괴리만큼 마음이 힘들었다. 마음은 힘든데 반대로 땀은 식어갔다. 어쨌든 앞으로는 가야지. 시작한 경기 끝은 내야지 하며 발을 끌며 걸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응원해준다. 지친 듯 걷고 있는 마라토너에게 힘을 준다. 마음의 손을 내밀어 내 등을 밀어준다. 포기하지 마! 힘내! 달려!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선의와 진심으로 가득하다. 진심으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웃었다. 웃는데 좀 울상이었을 것이다. 아니 모르겠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던 걸까. 

 

힘낼 수 없는데 힘을 받는 것은 안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아내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부둥켜안고 눈을 맞추었다. 눈을 보는 순간 긴말하지 않아도 무슨 마음인지 우리는 서로 다 알 것 같았다. 2시간 동안 하지 못한 말, 쌓였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울컥 터져 올라왔다. 울었는지 울진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 

 

애초부터 마라톤이란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경쟁 경기가 아닌데 나 혼자 그들을 경쟁 상대로 삼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잘못된 거냐 나란 놈.

 

  나는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섰을 뿐이다. 고작 한 번 시도했고 한 번 쓴맛을 보았을 뿐이다. ‘마라톤을 얕보고 오만하게 덤비다가 실패했답니다’하는 걸로 나의 마라톤 이야기를 끝낼 순 없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겸손하게 연습하고 다시 도전해서 안 다치고 완주 성공했습니다’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다. 

 

마침 마스크 시대가 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작년보다 빨리 못 달리지만 그 이유가 체력 탓인지 마스크 탓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다행이다. 마스크 탓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체중이 절반이 된 느낌, 다리가 사슴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날아가며 경쾌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십여 년 전 운동무능력자라고 스스로를 가두었던 한계를 깨는 달리기를 지나, 목에서 피맛이 올라오도록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기록 갱신을 즐기던 달리기를 지나, 이제 나는 ‘산책의 달리기’를 한다.

 

  눈이 내린 날에는 눈길 산책을 즐기고 맑은 날에는 하늘을 보며 달린다. 아침은 아침이라 좋고 밤은 밤이라 좋다. 달리기는 그렇게 생활이 된다.



취향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저 멀리서 또 다른 누군가도 뛰고 있었다.  




‘제대로 하는 거 하나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그게 귀여워 같이 살지.’ 




반대로 덜기 위한 달리기는 정반대의 무드를 자아낸다. 하루의 고됨을 씻어내기 위해, 해결하지 못할 답답함을 덜어내기 위해, 삶의 근원적인 고민을 게워내기 위해 그들은 힘겹게 내달린다. 



달린 후의 후련함과 가벼워짐에 중독돼 언제부턴가 달리기 없이는 도저히 하루를 버틸 수 없다.

 

  그래서 매일 달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현실을 잊기 위해 숨이 턱턱 막힐 때까지 달리는 하루가 반복됐다. 

 

나 또한 좋아하는 마음을 앞세워 부정적인 감정과 기운을 밀어낸다. 그렇게 외모로는 금성무는커녕 은성무도 동성무도 될 수 없겠지만, 마음만은 단단한 철성무를 꿈꾼다.




달리기의 모든 것

 

욕심을 내려놓고, 몸이 달리기에 적응하기까지 기다리는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착지를 사뿐하게 한다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넣어야 한다. 

 

달리기를 즐기는 정형외과 의사선생님이 지은 책.

정보가 많음.

의학적인 정보도 많음. 

트레일 러닝 교과서

 

자연 속을 달릴 때 시간 흐름은 일상에서 체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정보 중심의 책! 

트레일은 딱 한번 해봤지만 관심이 간다. 

다시 살펴볼까

삶이 버거운 당신에게 달리기를 권합니다



충동적이라고 할 만큼 가벼운 마음으로 그날 처음 얼떨결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지면 그만이지’라는 마음이 컸다.

평소 일 때문에 신경이 바싹 곤두서 있어서 진이 다 빠지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시원하게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면서 땀을 흘리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매일 달리기를 한다고 해서 힘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내가 끌어안고 있는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몸이 그렇게 외쳤다. 몸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달렸다. 

한 가지 더 달리기를 통해서 최근에 깊이 깨달은 바가 있다. 매일이든 2, 3일에 한 번이든 일상적으로 내가 계속하는 것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 반드시 어떤 성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는 보람이나 실감처럼 감각적으로 경험하기도 하고, 숫자처럼 객관적인 자료로 드러나기도 한다. 

꾸준히 한다는 것은 점으로 끝내지 않고, 점과 점을 이어서 선을 만든다는 뜻이다. 한 번 하고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다음 기회를 만들어내서 조금씩이라도 이어가야만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낼 수 있다.

달리기 시작한 후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 끊임없이 이어지던 생각이 없어지면서 무념무상 상태가 된다. 그 상태가 내게는 일종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생각의 굴레에서 해방된 듯한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매일 꼬박꼬박 달린 게 문제였다. 당시엔 나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그건 확실히 발에 부담을 주는 행위였다. 나 같은 초보 러너는 2, 3일에 한 번씩 달리는 게 좋다는 것을 뼈아픈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9년째 달리기를 계속해온 나도 최근에서야 ‘신발 끈 제대로 묶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남에게 배우기보다는 직접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실패를 경험하고 싶었다.  

내가 일에 대한 압박을 견뎌내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달리기는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끝내 손을 들고 마는 순간도 있지만, 세심하게 살펴보면 실마리는 어디엔가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방법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고자 시도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신없이 바빴기에 달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국인 참가자들한테 왜 그렇게 빨리 달리는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대다수가 “머리를 비우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대부분 신발을 신을 때면 코 쪽을 탁탁 치면서 신던 버릇이 남아서 발가락 쪽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는데요. 발뒤축을 맞춰 신는 게 중요합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단순한 예로 중요한 일에 지각할 것 같은 순간에도 달리면 어떻게든 된다는 신기한 감각이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달리는 자유만은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는데, 그런 날도 달리면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돼요. 달리기가 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관점을 바꿔서 말하면, 싫증이 났다는 건 일정 수준 이상 도달했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초기에는 설렘과 놀라움으로 넘쳤던 세상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정지된 시간이 길어지면 질리고 만다. 어쩌면 싫증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든 8할까지는 노력한 결과가 순조롭게 눈에 보이다가 거기서부터는 다른 차원이 시작된다.

달리기를 생활의 일부로 만드는 게 목표라면, 일주일에 세 번씩 7킬로미터를 45분에 달리기만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더 높은 세상을 찾고 직접 그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아름다운 달리기’를 목표로 삼고 달렸다. 아름다움은 인생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테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아름다움에 매달리는 걸까’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오해를 살지도 모르지만, ‘미’를 추구하느냐 마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방법이 뭐가 됐든 그 사람에게 맞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혼자 달리는 것은 정말로 과분한 시간이다.

달리면 머리가 맑아진다. 체에 걸러서 불순물이 제거되는 느낌이라고 하면 맞으려나. 

내가 달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긴장을 풀기 위해서니까. 

어떤 의미에서 달리는 시간은 비현실적이며 현실 도피가 가능한 시간이기에 달리기는 나의 도피처라고 할 수 있다. 겨우 한 시간 현실에서 도망칠 뿐인데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온다면 꽤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닌가. 

“마음 편하게 살면서 일에서 목표를 달성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만약에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거침없이 “달리기가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내 삶에서 달리기를 빼면, 나는 더는 성과를 내지 못할 것만 같다. 그만큼 달리기는 내 삶에 깊이 밀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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