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리기가 싫어♥

나는 이 책이 좋더라. ㅎㅎㅎ



몇 초, 몇 분 쯤은 이런 생각이 든다. 음, 썩 나쁘지는 않네.

꼴 보기 싫을 때가 많은데 희한하게 나랑 잘 맞는 괴짜 친구에 가깝다.

달릴 때마다 단 몇 초, 몇 분이라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순간이 찾아온다.

달리기 전에는 터무니 없이 멀어 보이고 뛰는 중에도 뭐가 이리 먼가 싶지만, 하루 이틀 지나고 나면 그 정도는 할 만 했어. 라는 생각이 든다. 

시작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쉬워야 한다.

속도를 내는 것보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산을 천천히 타면서 휴식을 최소화하는 방법이 급하게 오르다가 자주 멈추는 쪽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훈련법을 따르든 달리기의 80퍼센트는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빨라져야겠다는 생각을 버리면 오히려 더 빨라질 수 있다.

쉽고 > 가볍게 > 부드럽게 > 빠르게

즐기는 것이 우선이다. 즐길 수 있어야 오래 달릴 수 있다. 오래 달리면 는다.

완주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힘껏 달리기 때문에 응원하는 것이다.

해냈다고 말하는 것, 거기에 큰 만족감이 있다.

불안한 상황을 피하면 더 불안해집니다. 하면서 불안한 게 나을까? 하지 않으면서 불안한 편이 나을까? 

숙련된 러너라도 달리는 것은 늘 불편하다. 다만 불편함에 조금 더 익숙해졌을 뿐이다.

솔직히 달리기는 개떡 같다. 처음에는 고통스럽고, 익숙해지면 불편한 정도가 된다. 그러면 통증이 나타날 때까지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통증의 강도도 줄어든다. 

몇 분간 달리다 보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유일하게 검증된 추운 날씨 적응법은 추운 데서 시간 보내기다.

마지막 20퍼센트가 노력의 80퍼센트. 

모든 장거리 달리기는 다리로 달리는 거리가 반이고, 나머지는 머리(의지)로 달린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에 달렸다.
(무라카미 하루키)

의욕에 기대지 마라. 훈련을 믿어라.

공포 기반 단련 계획!!
젠장 큰일났다. 무섭고 중요한 일!

의무감은 영감만큼은 매력이 없지만 중요하다. 

당신이 빨리 달리든 말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근데 나는 안다.)

이유는 본인이 정하기에 달렸다.

장기전이다.

출발선에 서기 전에 기나긴 거리, 기나긴 시간을 달려야 한다.

터무니없는 거리를 달리기 위해 얼마나 훈련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애초에 그런 한계는 없다.

많이 달리는 훈련도 있고, 적게 달리는 훈련도 있지만 안 달리는 훈련은 없다.

조만간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시작할 때는 괴롭지만 끝나고 나면 상쾌하다. 그 과정을 반복하면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썩 나쁘지 않다는 상태가 계속되면 조금 좋아지기 시작한다. 어느 날 문득 달리기 없이는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고 참 묘하게도 내가 달리기를 사랑하는가 싶어진다. 

주로 천천히 달려라.

내 생각에는 그냥 부딪혀 보는 것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힘껏 달리고 나면 그 날을 버틸 힘이 생겼고, 원망하던 사람들이 서서히 용서됐다. 울적한 기분으로 아침에 일어났더라도 달리고 나면 웃으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특별한 하루를 보낸 것도 아니지만, 특별해졌다. 그래서 행복했다. 이것이 내가 달리기를 시작한 진짜 이유다. 

앞으로 더 이상 달려 나갈 수 없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뭔 소리냐고? 

나에게 안 좋은 생각을 온전히 떨쳐내는 유일한 시간이 생겼다. 달리는 동안에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잠식하지 않았다.

  내가 나쁜 생각으로부터 도망치는 중인 걸까? 어쨌거나 달리는 동안에는 나쁜 생각의 꼬리에서 벗어나 안도감이 들어서 좋았다. 그 느낌이 좋아서 계속 달리게 됐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성취의 양은 내가 정할 수 있다. 성취의 크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빈도가 더욱 중요하다. 이것이 내가 달리면서 얻은 소중한 진리다.

  다른 스포츠 대회는 순위권 안에 들어온 선수에게만 메달을 주지만, 마라톤대회는 완주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나 메달을 준다.  

달리기는 다르다. 달리기만 했을 뿐인데…, 잘했다고 토닥여주고, 간식도 주고, 사진도 찍어준다.

마라톤을 완주해냈다는 자신감이 그간 망설였던 꿈을 꿈틀거리게 도와주었다.

사실 마라톤 풀코스는 42.195km가 아니다. 단 하루를 달리기 위해 수개월을 쉼 없이 준비한 수백 km의 결과다.  

넘어지면 아프지 않느냐고? 넘어져도 괜찮다. 넘어졌을 때 바닥에 있는 예쁜 조약돌을 하나 손에 쥐고 일어서면 된다. 나에게는 조약돌이라는 남들이 갖지 못한 무기가 있으니까.

나를 지나쳐가는 경쟁자들을 바라보며 진심을 다해 응원했다. 그들의 뒤를 쫓아가면서 더 긴 거리를 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는 차근차근 연습했고, 점차 강해졌다. 내가 흘린 땀이 모여 근성이 되고 끈기가 되었다. 

밤낮으로 달리기 훈련을 하면, 그 어떤 재능 있는 러너보다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노력한 만큼 좋아진다. 달리기는 그만큼 정직한 운동이다. 하루를 쉬면 내 몸이 알고, 이틀을 쉬면 코치가 알고, 사흘을 쉬면 함께 달리는 친구가 안다. 


• 어제보다 딱 1km 멀리 달리기 
• 어제보다 km당 1초 더 빠르게 달리기
  딱 5분만 더 달리면 1km를 더 달릴 수 있다. 10km를 달린다고 가정했을 때 10초 빠르게 달리면 km당 1초를 단축할 수 있다. 5분 더 달리기와 10초 단축하기는 실로 거대한 변화다. 쉬울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다. 이를 악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겨우 성공할 수 있다. 


함박눈 속에서도 달리고 벚꽃비를 맞으면서도 달린다. 사실 달리기에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마음만 있을 뿐이지. 폭우가 쏟아지거나 황사, 미세먼지가 심하면 건강상의 이유로 달릴 수 없겠지만, 특별한 날씨에서 달리는 건 아무나 겪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이다. 


누군가 달리기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은 날이 있어요. 어떤 날은 그냥 시키는 일만 하고 싶어요. 그게 더 편해요. 마라톤은 고민 없이 달려도 돼서 좋아요.”


달릴 수 있는 복장으로 잠들자. 그리고 일어나면 곧바로 밖으로 나가자. 

천천히 달릴 때는 오른쪽, 추월할 때는 왼쪽을 이용한다.

추월할 때는 감사의 표시를 잊지 말자. “왼쪽으로 지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미리 양해를 구하고, 추월한 후에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예의를 표하자. 

그럴수록 나는 더 자주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조언을 구해보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퍽퍽한 삶을 유연하게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달리기 훈련을 꾸준히 하면 폐활량은 충분히 증가한다. 실전에서 긴 시간을 달려도 숨이 차지 않는다. 문제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록이 보잘 것 없어도 괜찮다. 어쨌든 당신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봤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달리기

 

갑자기 진공상태가 되어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무엇보다 온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이별의 잔여물이 적어도 달릴 때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별 후유증에 휩쓸리던 일상에서 우연히 튄 스파크에 불과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작은 불꽃이 삶 전체로 번지는 불길이 되기도 한다. 

아침의 달리기와 밤의 뜀박질은 전혀 다른 종목이었다.

아침 달리기가 막 깨어난 생기와의 조우라면 한밤의 달리기는 숨죽인 듯 고요한 레이스다. 아침 러너가 다가올 하루를 낙관의 물감으로 물들일 때, 밤의 러너는 이미 과거가 된 하루를 차분히 쓸어담고 정리한다. 일상에 치여 기진맥진했던 마음을 들여다보고 삶이 남긴 근심과 아쉬움을 날숨으로 내뱉는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고민의 무게가 조금은 줄어든다. 하루 종일 괴롭히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동시에 내일의 희망을 빼꼼히 엿본다.

심야의 뜀박질은 그때마다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렸다. 뛰는 순간만큼은 근육부터 호흡까지 몸의 변화에만 집중하며 생각을 비워냈다. 멘탈에 놓는 모르핀 주사처럼, 도무지 떨치지 못하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릴 때는 잠시나마 자취를 감췄다. 더불어 목표했던 거리를 어렵사리 완주해내면 그 자체만으로도 용기를 얻었다.

달리기는 시보다는 소설 쓰기에 가깝다. 시작부터 천재성이 폭발하는 재능 집약형 운동이라기보단 더 오랜 시간 공들여 나만의 레이스를 축조해가는 일이다. 처음부터 잘 달리는 사람은 없다. 출발선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작이 미숙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닿는다. 달리기란 원래 그런 운동이니까. 

그렇다. 모든 취미생활은 장비를 지를 때, 그제야 비로소 시작된다. 

돈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돈을 쓰겠다는 의지가 있다. 취미생활의 출발선에서는 평소보다 소비의 끓는점이 대폭 낮아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에 무엇이든 살 수 있고, 아무것도 모르기에 소비가 가져다줄 장밋빛 미래를 더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 그렇게 무지한 스스로를 인정하고 돈으로 혼쭐내겠단 마음을 품는 순간, 우리는 자본주의형 러너로 거듭난다. 

달리기를 위한 소비는 지름이 아닌 ‘내몸학개론’ 수강료에 가깝다. 

아직 주저하게 된다면 마음에 거대한 꽃밭을 조성해보자. 그 꽃의 이름은 합리화다. 합리화를 머리에 꽂고 지금 당장 최애 브랜드의 매장으로 달려가보자.

하지만 발전은 끝없는 땀과 고통을 재물로 요구했다. 결국 보람이라는 동력은 금방 힘을 잃었고 나 역시 조금씩 지쳐갔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이는 건 성취감보다 더 본성에 닿아 있는 감정이다. 예를 들면 재미 같은 것. 더군다나 그게 취미의 영역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내게 달리기란 하루 동안 쌓인 감정을 비워내고 차분히 하루를 끝맺는 혼자만의 의식이다. 애초에 누군가와 함께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밤이면 밤마다 집 앞 공터를 홀로 달렸다. “혼자 달리면 안 심심해?”라는 친구의 말도 성수동 혼익인간에겐 그리 와닿지 않았다.

누군가와 함께 달릴 때면 지금의 고통이 나만 겪는 게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재밌는 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뛸 때의 고통이 상당 부분 덜어진다는 점이다. 옆 사람도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 버티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면 포기하려던 마음은 조금 더 해보자는 의지로 전환된다. 사실 뒤처지는 게 창피해서 이를 악물고 달린 것도 없지 않다. 하지만 동기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첫 러닝 크루 경험은 내게 달리기가 혼자만의 세계로 남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남겼다. 동시에 함께 달리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요일마다 서울숲을 달리는 ‘123K30Days’는 매년 우리나라 마라톤 역사의 상징인 8월 9일***을 기리기 위해 8.9km를 함께 달리며 가슴 아픈 역사이자 영광의 시간을 되새긴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또는 내가 해오던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목표가 높은 벽처럼 등장한다. 전에 없던 방법이 필요한 시기다. 그때부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적 있는 달리기가 필요하다. 흔히 ‘훈련’이라 부르는 고된 과정이다.  

LSD가 폐를 확장시켜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게 몸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인터벌은 심폐 능력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며 단단하게 굳히는 과정이다.

인터벌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고통스러웠다. 특히 한여름으로 접어들자 온몸이 땀으로 절었고 달리다 현기증까지 올 정도였다. 그럴 때면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여러 취미들을 깨작거리다 달리기에 안착했던 이유는 경쟁의 대상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매력 때문이었다. 달리기가 다른 누군가를 이겨야 하는 운동이었다면 나의 외콧구멍은 패배의 원인이자 책임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또 한 번 재능의 부재를 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기는 내 앞의 누군가를 제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운 목표, 혹은 과거의 나와 벌이는 대결이다. 대결에서 패했다면 그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콧구멍을 핑계 삼아 더 나아가지 않은 태도의 문제다. 결국 내 콧구멍이 한 개든 세 개든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딱 한 가지 생각만 깊게 하거나, 아무 생각도 안 합니다.” 

달리면 모든 게 단순해진다. 아무리 무거운 고민이라도 달리기 시작하면 점차 그 부피가 줄어든다. 몸이 바쁘게 돌아가니 평소처럼 복잡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다. 우선순위 정렬 버튼을 누른 것처럼 중요치 않은 것들은 자연스레 생각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마음 한가운데에는 고민의 본질만이 남는다. 그렇게 본질과 직접 대면하면 생각보다 쉽게 고민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당시에는 세상 복잡하고 어려웠던 고민이 지금 돌이켜보면 참 별거 아니었음을 깨닫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깊은 통찰로든 시간의 흐름으로든 고민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 핵심과 마주할 수 있다면 모든 건 명쾌해진다. 달리기는 그 껍질을 용이하게 벗겨주는 과도가 되어준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뜀박질의 숨은 기능이다. 늦은 밤이어도 무거운 마음 하나가 일상 전체를 짓누른다 느낄 때면 기어코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38km가 넘어가면 모두가 한계점에 도달한다. 내 몸 하나 가누기 어려워 어느 것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다. 그때 감정의 속살이 그대로 노출된다. 수많은 마라토너들이 사소한 감정의 동요에도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이유다. 일면식 없는 누군가의 응원에, 함께 훈련했던 동료들 생각에, 아니면 그냥 너무 힘들어서. 얼굴은 땀으로 위장한 눈물로 범벅이 된다. 나 역시 끝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내 눈물의 주요성분은 설움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타지에서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왜 이런 고통의 시간들을 자초했는지. 스스로를 향한 미움과 한탄과 연민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래도 끝은 내야 했다. 들썩거리는 어깨와 함께 마지막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해냈다고 하기에는 민망하지만 어쨌거나 완주는 했다. 목에 걸린 메달을 보자 또 한 번 눈물이 났다. 이게 대체 뭐라고. 그 와중에 메달은 눈치 없이 아름답게 빛났다. 한동안 앉아 있다가 돌아가려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정신이 아득해지며 모든 게 블러 처리됐다.

  
  눈을 뜨자 내 위로 흰 천이 펄럭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가 의료 부스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이다. 그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내가 깨어난 걸 확인한 스태프는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내 상태를 설명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 특유의 영어 발음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반복되는 ‘쇼크’라는 단어와 30분 정도 더 쉬다 가라는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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