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다면 사도 아깝지 않은 책.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사람을 만난다면 사줘도 아깝지 않은 책.

이 문장이 마음에 와닿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내 책을 주고 싶은 책. 

 

 

 

 

 

 

멈추면 땀은 식기 마련이지만 땀이 식으면 더 춥구나라고 생각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생각

 

좋든 싫든

나 혼자 자꾸 생각하는

정답을 떠올리기 싫은

틀린 대답을 하고 싶은 물음

 

흔해빠진 일들을 쌓아 

내가 만든

고립과 단절의 어둠

 

비가 안 오면 물은 마르기 마련

날이 따뜻해지면 오리도 떠나기 마련 

 

강물처럼 길만 따라 흘러가는 대로 

구름처럼 바람만 따라 흩어지는 대로 

본질은 잊고 그냥 열심히 달릴 것

 

지금 그저 달리는 것이

나라는 사람이라는 것임을

내가 하고 싶은 것임을

내가 되고 싶은 것임을

내게 달리기가 찾아온 의미임을 

생각하며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공백으로 지워가며

내가 누구인지를

침묵으로 버텨가며

어둠을 어둠으로 느끼지 못할 때까지

내 페이스와 시간성으로 

소리 죽여 그냥 달릴 것

 

그것이 지금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것

핑계를 대지 말 것

건너뛰거나 그만두지 말 것

이것이 내 생명선

 

달리고 달리다 보면 해가 뜨고 

산봉우리에 걸린 짙은 안개를 걷어 낼 것을 

 

어둠을 달리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을

 

지금 내 달리기를, 

내 가능성을, 

나라는 존재를 

믿고 믿고

 

소리 죽여 

흘러가는 대로 

흩어지는 대로 

그냥 달릴 것

 

(나는 그런 것)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달린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명상 상태와 비슷한 주법이었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신체를 움직여 나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직감적으로.

 

지금도 나라고 하는 인간 속에 그만한 가능성이 남아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

 

달리는 생활이 별로 대단한 일도, 대단한 분량도 아닐지 모르지만, 거기에는 뭔지 모를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뭐가 어찌 됐든, 그저 한결같이 달리고 있다.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달리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는 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소리내어 말해보면, 거기에서 뭔가를(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마는 듯한 절실한 감각을 느낀다. 

 

실패가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확실하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나는 이런 일에 관해서는 비교적 집요한 성격이다. 뭔가 잘 안 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잘 될 때까지 납득도 할 수 없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는다. 

 

나는 그런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좋은 싫든,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




 

 

하고 싶은 것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다른 사람

 

나는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서툴지만, 트라이애슬론 선수들과는 마음 편하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느 쪽이냐 하면, 특수한 인종인 것이다. 연대감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해도, 따사로운 공통점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는 막연하게, 늦봄 산봉우리에 걸린 옅은 빛깔의 안개처럼 존재한다. 

 

그리고 끝으로, 함께 뛴 모든 주자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만약 그 주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이렇게 계속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인생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램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이젠 그저 레이스를 마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것이 실제로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 해나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그럼에도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강물을 생각하려 한다. 구름을 생각하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는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그저 계속 달려가고 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달리는 이야기에 관한 책이지 건강법에 관한 책은 아니다. 

 

나는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이 달리는 의미를 찾기 위해 손을 움직여서 이와 같은 문장을 직접 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힘들다 이젠 안되겠다라고 생각했다고 치면 힘들다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젠 안되겠다인지 어떤지는 어디까지나 본인이 결정하기 나름인 것이다. 이 말은 마라톤이라는 경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달리기에 대해 정직하게 쓴다는 것은,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어느 정도 정직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무엇이 어떻든 간에, 그것이 나라는 인간인 것이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고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을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 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할 때 편해진다.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나는 그런 흔해빠진 일들이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다.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면 때때로 나 자신이 해변에 밀려온 한낱 나무토막에 지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 달에 대충 260킬로라는 숫자가, 나에게는 착실하게 달린다고 하는 일단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머리가 멍해진다. 정리된 생각은 어느 한 가지도 할 수가 없다. 그래도 참고 끝까지 달리고 나면, 몸의 중심에서 모든 걸 깡그리 쥐어짜내 버린 것 같은, 어쩌면 모든 걸 다 털어내 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우러난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경기에는 잘 맞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좋든 싫든 그것은 타고난 나의 성격인 것이다. 

 

어떤 일이 됐든 다른 사람을 상대로 이기든 지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설정한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더 관심이 쏠린다. 

 

장거리 달리기에 있어서 이겨내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지불한 만큼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는 실망감이 있었고, 열려 있어야 할 문이 어느 사이에 닫혀버린 듯한 폐쇄감이 있었다. 그것을 나는 러너스 블루라고 이름 붙였다.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혼자 있는 것을 별로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까닭에 하루에 1시간쯤 달리며 나 자신만의 침묵의 시간을 확보한다는 것은, 나의 정신 위생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업이었다. 적어도 달리고 있는 동안은 누구와도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고, 누구의 얘기도 듣지 않아도 된다. 그저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이제까지 달리면서 무엇을 생각해왔는지, 제대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거꾸로 말해, 공백을 획득하기 위해 달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달리고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비슷하다.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자진해서 고립과 단절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립과 단절은 사람의 마음을 갉아먹고 녹여버린다. 그것은 예리한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다. 나는 신체를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직감적으로.

 

협조하려는 마음이 없는 그런 인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혼자 벽장 속에 웅크리고 있으려는 그런 인간에게, 도대체 누가 호의를 느낄 수 있겠는가?

 

달리는 생활을 되찾은 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뭔가를 의미하고 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고, 대단한 분량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뭔지 모를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뭐가 어찌 됐든, 그저 한결같이 달리고 있다. 



야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나로서는 무엇이 어떻든 간에, 아무 생각 없이 소설이라는 것을 쓰고 싶었다. 

 

매일 달리게 되면, 담배를 끊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ㅡㅡ 더 달리고 싶다는 욕구는 금연을 계속하기 위한 중요한 동기가 되었고, 금단현상을 극복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일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이 상당히 좋은 가게다 마음에 든다 또 오고 싶다라고 생각해주면 그것으로 족하다. 경영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한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마음들게 만들 필요가 있다. 

 

스트레칭 같은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지만 부상 하나, 상처 하나, 병 한 않은 적이 없다. 뛰어난 러너는 전혀 아니지만 튼튼한 러너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부럽다)

 

서른 살이 넘은 지금도 나라고 하는 인간 속에 그만한 가능성이 남아 있었구나, 하고 느꼈다.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나에게 샘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괭이를 손에 쥐고 부지런히 암반을 깨고 구멍을 깊이 뚫지 않으면 창작의 수원에 도달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계속 달리는 것과 의지의 강약과의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느낌마저 든다. 내가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지 때문이다. 

 

느낀 바가 있어 내 멋대로 소설가가 되었다. 

 

누군가 권한다고 해서 러너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그렇게 될 만해서 러너가 되는 것이다. 

 

아니, 그때도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세코 씨 입에서 직접 그런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물을 마시는 데 필요한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다. 

 

드디어 결승점에 다다랐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좋다라는 안도감뿐이다.

 

제정신을 잃은 인간이 품는 환상만큼 아름다운 것은 현실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마라톤까지의 소요 시간은 3시간 51분. 좋은 기록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혼자서 마라톤 코스를 주파한 것이다. 교통지옥과 상상을 초월하는 더위와 격렬한 갈증을 극복하고. 이만하면 나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좋을듯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금 이 순간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더 이상 한 발짝도 달릴 필요가 없다. 뭐라고 해도 그것이 가장 기쁘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괜찮다.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달리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다. 매일 달린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선과 같은 것으로, 바쁘다는 핑계로 인해 건너뛰거나 그만둘 수는 없다. 만약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달리는 연습을 중지한다면 틀림없이 평생 동안 달릴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다.

 

다만 멀리까지 달려갔다 되돌아오는 코스이기 때문에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피곤하니까 도중에 그만 둘 수 없다. 기어서라도 어떻게든 집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바람직한 환경이라고 말할 만도 하지만.

 

재능, 집중력, 지속력

 

그에 비하면 나는, 내 자랑을 하는 건 아니지만, 지는 일에 길들여져 있다. 세상에는 내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산만큼 있고, 아무리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산더미처럼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녀들은 아직 그런 아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것을 지금부터 굳이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녀들의 유유히 흔들리는 자랑스러운 포니테일과 호리호리한 호전적인 다리를 쳐다보면서 나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 그리고 페이스를 지키면서 느긋하게 강변도로를 달린다.

 

그녀들에게는 그녀들에게 어울리는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나에게는 나에게 적합한 페이스가 있고 시간성이 있다. 그것들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며,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 체내의 독소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언제가 사람은 패배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내 글로 소화한 것을 사람들 앞에서 실제로 소리내어 말해보면, 거기에서 뭔가를(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리고 마는 듯한 절실한 감각을 느낀다. 

 

무리를 해서 계속 달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걷는 쪽이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다리를 쉬게 한다. 그렇지만 나는 한 번도 걷지 않았다. 나는 걷기 위해 이 레이스에 참가한 건 아니다. 달리기 위해 참가한 것이다. 아무리 달리는 스피드가 떨어졌다 해도 걸을 수는 없다. 그것이 규칙이다. 만약 자신이 정한 규칙을 한 번이라도 깨트린다면 앞으로도 다시 규칙을 깨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레이스를 완주하는 것은 아마도 어렵게 될 것이다. 

 

자동조종 같은 상태로 몰입해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더 달리고 있으라는 말을 듣는다면, 100킬로 이상이라도 아마 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는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머릿속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함을 이상함으로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는 달린다는 행위가 거의 형이상학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행위가 먼저 거기에 있고, 그 행위에 딸린 것 같은 존재로서 내가 있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명상 상태와 비슷한 주법이었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의식이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존재로 다가온다. 의식이 없는 곳에 주체적인 이야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식 같은 건 특별히 대단한 것은 아닌 것이다, 라고.

 

(100킬로 완주 후)

몸속에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점점 느슨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지만.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다수의 사람들이 아마도 그렇듯이 나는 쓰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문장을 지어 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한다. 쓴다고 하는 작업을 통해서 사고를 형성해간다. 다시 고쳐 씀으로써 사색을 깊게 해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문장을 늘어놓아도 결론이 나오지 않고, 아무리 고쳐 써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경우도 물론 있다. 가령 지금이 그렇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내 몸에 배어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그것이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려 하고 있는지.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밖에 없는 것이다. 

 

겨우 하프 마라톤을 적당한 속도로 달린 정도로 지쳐버린다면, 마라톤 풀코스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나는 오래된 LP를 수집하는 것에 관한 한(아니, 무척) 열성적인 인간인 것이다. 현재 우리 집에 있는 레코드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나로서도 잘 알 수 없다. 세어본 적도 없고, 감히 그런 무서운 일을 하려는 마음조차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척 많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페이스를 지키고 힘을 안배하면서 달렸다. 주변의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면서 기분 좋게 코스를 달리고 자 지금부터 페이스를 올려 나갈까하는 지점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지점은 끝까지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이것만큼은 꽤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다. 좋아 이번에는 잘 달렸다라고 하는 느낌이 회복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앞으로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풀코스를 계속 달릴 것이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여기까지 와버렸는데 이젠 그저 레이스를 마칠 수밖에 없다. 3시간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헤엄치고, 그저 사이클을 타고, 그저 달리는 것뿐이다. 

 

자유형으로 아무 어려움 없이 수영할 수 있었다. 호흡도 편안하게 할 수 있고 몸도 부드럽게 움직인다. 도대체 왜 본 경기에서는 이와 똑같이 안 되었던 것일까?

 

그런 이유로 내 트라이애슬론 도전은 일단 4년간 공백을 두게 된다. 그사이 평소와 똑같이 장거리를 달리고, 1년에 한 번 마라톤 레이스에 출전해왔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마음은 조금도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 트라이애슬론에서의 실패가 머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확실하게 복수를 해야겠다고 줄곧 생각해왔다. 나는 이런 일에 관해서는 비교적 집요한 성격이다. 뭔가 잘 안 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잘 될 때까지 납득도 할 수 없고, 마음도 안정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교제가 서툴지만, 트라이애슬론 선수들과는 마음 편하게 솔직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어느 쪽이냐 하면, 특수한 인종인 것이다.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여간해서 정상적인 생활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한 사람, 기인이라는 말을 들어도 불평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연대감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라 해도, 따사로운 공통점 같은 것이 우리 사이에는 막연하게, 늦봄 산봉우리에 걸린 옅은 빛깔의 안개처럼 존재한다. 

 

다음 레이스에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 혹은 훨씬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 

 

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 해나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 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 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득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다. 혹은 가령 조금이라도 그것들과 비슷한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묘비명 

작가(그리고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제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길 위에서  스쳐 지나며 레이스 중에 추월하거나 추월당해 왔던 모든 마라톤 주자들에게 (나는 나에게 그리고) 이 책을 바치고 싶다. 만약 그 주자 여러분이 없었다면, 나도 아마 이렇게 계속 달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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